표주박의 散文노트

나를 멈추게 하는 것

샘터 표주박 2003. 10. 15. 23:33




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간 이는 몇 명이나 될까
내 마음을 흔들고 멀어져간 이는 지금쯤 무얼할까

사람과 사람을, 영혼과 영혼을 잇는 영매 역할이기를 소망하지만
내 영혼의 빈터는 늘 척박하기만 합니다.

지식을 쌓은 것만큼, 이치를 깨달은 것만큼, 상대를 이해 한 것만큼,
자연에서 느낀 것 만큼 보이는 것이 세상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소리로, 작은 소망을 찾아
오늘도 골목길을 걷습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등불이 될 수 있기를
그러나 정영 눈부시지 않고 은은한 불빛이기를
낮은 촉수로나마 어둔 마음이 밝아질 수 있기를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한 발견이기를

사막처럼 메마른 삶에 생수의 강이 흐르기를
곧 다가올 나목의 계절에도 온기가 펴지기를
소망하면서 걷다가 멈추다가를 반복합니다.


-남들이 일하는 시각에 공원을 서성이며 기웃거리는 실직 가장의 힘
없는 뒷모습이 눈길을 멈추게 합니다.

-태풍 매미가 휩쓸고 지나간 상처를 더 아프게 하였던 것은 뮤지컬의
가락이 아니라 호사스런 무대장치였기에 허허한 발걸음을 멈춥니다.

-지하철 계단에서 손 내밀고 서 있는 노인의 힘없는 시선을 피해 버린
나의 잰 발걸음이 내 뒤통수를 멈칫거리게 합니다.

-시장어귀에서 검게 그으른 얼굴로 나물을 다듬는 할머니의 거칠고
시커먼 손앞에 하얀 손등을 내밀며 멈추어 섭니다

-뼈만 앙상한 중풍환자 어머니를 안고 계단을 내려와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향는 옆집총각의 부모섬김이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임종을 기다리는 말기암 환자의 꺼져가는 의식이 호흡을 갈앉히고
바치는 마지막 임종기도를 멈칫거리게 합니다.

-졸지에 당한 사고로 부모를 잃은 어린 상주의 철없는 손장난이 장례
미사의 슬픈 곡조마저 흐느낌으로 멈추게 합니다.

-명문대 문턱을 넘은 뇌성마비의 부자연스런 무공해 웃음은 아픔을
통과한 푸르름이기에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칠판에 한 줄 남긴 선생님의 약속.「2000년 2월 22일 오후 2시
덕수궁 앞에서 부라보콘 사줄게!」23년 후, 참교육 열매가 40여명의
얼굴에 알알이 영글어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굴러가는 자전거 핸들에 목줄을 걸고 죽을 힘 다해
매달려가는 애완견의 다이어트 문화가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후미진 길가에서 엷은 햇살을 받아 피어난 풀꽃의 가녀린 흔들림이
최고의 순간을 누리는 환호이기에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숱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보도 블럭의 틈새에서 고개를 내민
민들레의 끈질긴 생명력이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밤새 떨어져 내린 낙엽이 바람에 흩어지며 서로를 얼싸안는 모습이
곧 얼어붙을 대지를 걱정하는 것 같아 쓰레질을 멈추게 합니다.


나를 멈추게 한 그 힘으로 고독한 길을 다시 걷습니다.




-표주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