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듯' 사랑하고 기도하고 후회없이 살자

오늘이 마지막이듯

'김수환 추기경님'의 명복을 빕니다.

샘터 표주박 2009. 2. 16. 19:46

 

 

한국 천주교계의 정신적 지주인 천주교 김수환(87)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쯤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했다. 김 추기경은 지난해 8월부터 7개월여 동안 입원해 투병 중이었으며, 최근에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약해지면서 위독하다는 사실이 알려졌었다. 하지만 생명연장 장치 사용은 거부했었다. 김 추기경은 선종 직전 안구 등 장기 기증 의사를 밝혀 선종 후 장기 기증을 위한 적출 수술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대교구는 김 추기경 선종에 따라 서울 명동성당 등에서 장례 미사를 치르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빈소는 명동성당에 마련된 예정이다.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 대구에서 출생해 1951년 사제품을 받았고,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을 거쳐 1968년 대주교로 승품한 뒤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김 추기경은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인 최초 추기경으로 서임됐으며, 1998년 정년(75세)을 넘기면서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었다. 김 추기경은 군사정권 시대에 민주화와 인권 향상에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1971년 전국으로 생방송되는 성탄절 자정 미사에서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라고 물었고, 1987년 6·10항쟁 때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 연행을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라며 경찰 진입을 몸으로 막았었다.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은 누구인가 “교회의 높은 담을 헐어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합니다.” 1968년 서울 대교구장 취임식 때 김수환 추기경의 인사말이었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었던 김 추기경(세례명 ‘스테파노’)은 그의 호(號)인 ‘옹기’처럼 영욕의 한국 교회와 사회를 온전히 보듬어 담은 그릇이었다. 김 추기경은 1922년 6월3일(음력 5월8일) 대구시 남산동에서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였던 김보현(요한)이 1928년 무진박해 때 순교자였고, 그의 부모인 김영석(요셉)과 서중화(마르티나) 역시 가톨릭 신자였을 만큼 그의 집안은 독실한 가톨릭 가문이었다. 김 추기경은 보통학교 5년을 졸업하고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해 성직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1941년 동성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돼 그해 4월 일본 도쿄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1944년 일제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돼 사관 후보생 훈련을 받기도 했으나 이듬해 전쟁이 끝나고 학업을 마친 뒤 1946년12월 귀국선을 타고 부산항을 통해 귀국했다. 이후 1947년 초 서울의 성신대학으로 편입한 그는 4년 뒤 1951년 9월15일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김 추기경이 첫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북 안동 본당이었다. 그는 이후 1956년7월 독일 뮌스터대로 유학,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 귀국해 그해 6월 가톨릭시보사 사장에 취임했다. 김 추기경은 1966년 2월 44세의 나이에 초대 마산교구 교구장에 임명된다. 그는 1967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사임하면서 다음해인 1968년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됐다. 그는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됐으며, 4월30일 로마에서 서임식을 갖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로, 전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김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이후 1975년 6월 평양교구장 서리도 겸하게 된다. 김 추기경은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성회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가운데 개최하는 등 천주교 부흥에도 힘썼으나, 교회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사회의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도 목소리를 내 커다란 울림을 이끌어 냈다. 그는 1970년대 유신과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을 강력히 비난하는 등 역사 현실에 동참했다. 김 추기경이 머물렀던 명동성당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를 대변하는 ‘성지’로 불리기도 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때 대학생이 숨어 있는 명동성당에 공권력 투입하겠다는 정부 관계자의 말에 그는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먼저 저를 만나게 될 겁니다. 그 다음 신부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수녀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면 저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를 밟고 가십시오.” 김 추기경은 75세가 되던 1997년 교회법에 따라 로마 교황청에 서울대 교구장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1998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사임 의사를 허락해 1998년5월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에서 물러 났다. 서품을 받은 지 47년 만이었다. 매년 국내에서 가장 존경 받고 영향력 있는 종교지도자로 꼽힌 김 추기경은 한때 소나타2를 타고 다닌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이야기가 퍼진 후 천주교 내 주요 인사들 중 외제차나 고가 승용차를 이용하는 이들은 거의 없어졌다. 최근 노환으로 입원해 있던 김 추기경은 지난 6월11일(음력 5월8일) 86회 생일을 맞아 “빨리 사라져야 하는데 아직도 사라지지 못하고 하느님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다”며 “그런 저를 위해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해준다니까 정말로 감사하다” 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해 첫 그림전시회를 가진 김 추기경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고 밑에 ‘바보야’ 라고 보탰다. 한국 교회와 사회를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김 추기경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순박한 미소를 남기고 그렇게 세상을 떴다. 거인 김수환의 삶 16일 오후 6시12분께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87)은 1922년 6월3일 대구 가톨릭 집안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신앙심이 돈독한 부친 김영석(요셉)과 모친 서중화 (마르티나)가 아들을 추기경으로 키웠다. 세례명은 ‘스테파노’다. 초등학교 5년 과정인 군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형 동환과 함께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서울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일본 도쿄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수학했다. 44년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김 추기경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됐다. 항일 독립투쟁에 더 마음이 끌리던 시절이었다.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에 복학,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46년 귀국 후에도 서울 성신대(현 가톨릭대)로 편입해 신학 공부를 이어갔다. 이후 51년 9월15일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천주교 신부가 됐다.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북 안동성당(현 목성동 주교좌성당)이다.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 경북 김천성당(현 김천 황금동성당) 주임 겸 성의 중·고등학교 장, 교구 평의원 등을 거치며 활동 범위를 넓혔다. 56년 독일 뮌스턴대학으로 유학, 동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64년 귀국해서는 가톨릭 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이 됐다. 66년 44세의 나이로 초대 마산교구장에 임명됐다. 사목 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김 추기경은 67년 초 서울대교구장 노기남(바오로) 대주교가 사임하자 68년 제12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됐다. 1년 뒤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당시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김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 취임 일성은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였다. ‘봉사하는 교회’, ‘역사적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핍박받고 가난한 이웃에게 애정을 쏟았다. 독재와 불평등이 극에 달할 때마다 직언을 했고, 역사의 흐름은 제 줄기를 찾았다. 서울대교구장으로 30년 동안 재임하면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2차례 역임 했다. 주교회의 산하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고, 75년에는 평양 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70년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준비위원장으로도 활동 했다. 서강대, 고려대, 연세대, 미국 노트르담대, 일본 상지대, 미국 시튼힐대, 타이완 후젠가톨릭대, 필리핀 아테네오대 등에서 명예 문학·법학·철학·인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훈장 무궁화장(1970), 제13회 성균관대 심산상(2000), 제2회 인제대 인제인성대상(2000), 독일 대십자공로훈장(2001), 칠레 베르나르도오히긴스 대십자훈장(2002) 등을 수훈했다. 추기경님의 삶과 신앙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종교계의 큰어른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천주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을 안고 태어나 87년의 생애를 신앙 속에서 살다가 16일 선종 (善終)했다.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음력) 대구시 남산동 225-1번지에서 부친 김영석(요셉)과 모친 서중화(마르티나)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조부김보현(요한) 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이어온 집안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신앙이 돈독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박해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천주교 복음을 받아들인 조부는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논산군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됐다가 감옥에서 아사(餓死)로 순교했다. 이때 조모인 강말손도 남편과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돼 부친 영석을 낳았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 추기경은 신유박해 때 순교한 광산 김씨 일파의 후손이다. 유복자로 태어난 부친은 성장한 뒤 영남 지방으로 이주해 옹기장사를 하다가 혼인한 뒤에 대구에 정착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한 장소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기 어려워 대구를 떠나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잦은 이주는 집안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었고 형제들은 부친을 도와 생계를 꾸려야 했다. 김 추기경의 나이 다섯 살 때 그의 집안은 경북 선산에서 군위로 이주했고, 이때부터부친은 옹기점과 농업을 겸해 집안의 생계를 이어나갔다. 옹기장이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며 자란 탓인지 김 추기경의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25살이 되면 장가를 갈 생각” 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러나 장사꾼이 되려는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성소(聖召)를 받는 아들이 나오길 기대했던 부모의 깊은 신앙의 결실로 넷째 아들 동환과 막내아들 수환이 사제의 길을 걷게 됐기 때문이다. 모친의 희생과 사랑에 힘입어 동환과 수환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과정인 군위공립보통학교 1학년 때 부친을 여의었던 수환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모친의 권유에 따라 세 살 많은 형 동환과 함께 성직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보통학교 5년 과정을 마친 김수환은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해 성직자로 나가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서울의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일반 상업학교인 갑조(甲組)와 소신학교 과정인 을조(乙組)로 나누어 운영됐는데 김 추기경은 전 원주교구장 지학순(1921-1993) 주교, 전 전주교구장 김재덕 (1920-1988) 주교 등과 함께 을조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그가 순순히 사제의 길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신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꾀를 부려보기도 하고, 동성상업학교 3학년 때는 죄 같지 않은 죄까지 꼬치꼬치 고백해야 마음이 편한 이른바 ’세심병(細心病)’을 앓으면서 스스로 신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여겨 신부를 찾아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가 “신부란 자기가 되고 싶다고 되고, 되기 싫다고 안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꾸지람만 듣고 방에서 내쫓긴 적도 있었다. 더군다나 동성상업학교 시절 김수환은 일제에 대한 울분을 일기장에 적을 정도로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 졸업반인 5학년 때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를 받고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고 썼다가 교장 선생에게 불려가 뺨을 맞기까지 했다. 교장 선생은 버릇이 없다며 김수환 학생의 뺨을 때렸지만 마음 속으로는 “괜찮은 녀석 인데”라고 생각했던지 그가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추천했다. 그 교장선생은 제2공화국 때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1899-1966) 박사였다. 김수환은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해인 194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이 무렵 청년 김수환은 성직의 길보다 항일 독립투쟁에 더 마음이 끌렸지만 1944년에 들어서면서 모든 상황은 변했다. 당시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김수환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돼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을 받아야 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무모한 탈출을 감행하다 미수로 그친 적이 있지만 김수환은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학에 복학해 학업을 계속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해 초 서울의 성신대학 (가톨릭대 신학부)으로 편입한 그는 4년 뒤인 1951년 9월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장차 한국 천주교회의 버팀목이자 시대의 거목이 될 한 명의 사제가 탄생했다. 그가 사제 서품을 앞두고 고른 성구는 시편 51장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 소서”였다. 이에 대해 그는 회고록에서 “과연 한평생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 '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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