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듯' 사랑하고 기도하고 후회없이 살자

오늘이 마지막이듯

영명축일

샘터 표주박 2009. 7. 22. 14:43

안토니오 데 페레다 이 살가도(1611-1678) '회개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캔버스




언젠가 피정에서 들은 배광하 신부님의 말씀입니다. 노 부부가 살았습니다. 어느날, 영감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는 영감님 시신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영감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나도 영감님을 사랑했기에, 영감님의 죽음은 너무나도 애통하였고. 영감님 대신해 죽을 수도 있을만치 영감님을 사랑했습니다. 장례식을 치루고 영감님을 땅에 묻고왔어도 영감님의 죽음을 인정할 수도 없었고 영감님이 할머니 곁을 떠났다는 사실 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밤낮으로 땅에 묻힌 영감님이 죽지 않았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사흘되는 날, 영감님을 보고 싶은 마음을 누룰수가 없어서 무덤에 가서 무덤을 팠습니다. 죽은 영감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고파서.... "여러분 중에 이 할머니처럼 영감님을 사랑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 "마리아 막달레나는....이토록 주님을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09/07/22
-표주박~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허영업 신부-

 

제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는 그야말로 아이들이 많아 콩나물시루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는 데도 몇 달이나 걸렸고, 오랫동안 거의 익명(?)으로 지내는 학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성당 주일학교에서는 첫날부터 제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마티아” 하고 항상 웃으면서 세례명을 불러주는 것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어렸을 때 성당 주일학교를 학교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 그리고 이름을 부르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의 일부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처럼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와 ‘너’로 관계를 맺고, 또한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무엇’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슬픔에 빠져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마리아야!” 하고 먼저 이름을 부르십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입니까? 어느 성인의 말씀처럼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눈을 감고 나를 부르시는 고마운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시지 않겠습니까? 그전에 물론 마리아처럼 우리의 영혼도 주님을 애타게 찾아야 하겠지요.

 

↖허영민 ↑허영엽 ↗허 근

삼형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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