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듯' 사랑하고 기도하고 후회없이 살자

표주박의 散文노트

벼룩시장 순례기 1

샘터 표주박 2003. 12. 6. 18:16






벼룩시장 순례기 1


정장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굽이 낮은 구두를 착용하는 데도 계단을 오르내릴
때 무릎에 이상신호가 느껴진다. 휴일이면 남편과 동행하던 서울근교, 산행이랄 것
도 없는 서너 시간 코스를 바람이나 쐬러 나가는게 고작이었는데 그나마도 멈춘 지
세계절이나 뛰어넘었다. 하지만 보람있는 휴일 보내기가 어디 산행뿐이랴. 남편은
주 5일 근무이므로 토요일이나 공휴일엔 혼자서 용마산에 오르고, 주일이면 간혹 이
색제안을 한다.

"냉면 먹으러 나가자"

남편은 냉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냉면이란 단어 뒤에는 황학동 벼룩시장을 한바
퀴 돌자는 무언의 제안이 숨어있는 것이다. 하지만 냉면을 먹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곳에 가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 삶의 조각들 속에 끼어드는 좋은
기회이기에 마다 할 이유가 없다.

편한 차림에 채앙달린 모자를 쓰고 지하철을 이용하여 을지로 4가 좌측 출구로 빠져
나가 오장동 함흥 냉면 집에 이른다. 한여름에는 줄서기를 하고 차례가 오기를 기다
렸으나 오늘은 의자에 앉아서 먹는 행운도 누렸다. 뜨거운 육수와 회냉면 그릇이
우리 부부 앞에 던져지듯 놓이면 남편은 늘 그랬듯이 절반을 덜어 내 사리 위에 얹어
주고 한 젓가락남짓으로 요기를 한다. 냉면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한 유일한 배려이다.

냉면 집을 나서면 이제부터는 내가 남편을 위해 배려해야 할 시간이다. 건어물이 가
득한 중부시장을 관통하여 방산시장을 가로질러 청계천으로 접어든다. 휴일인데도
철시하지 않은 상점들이 듬성등성 눈에 들어오고, 각종 포장지를 비롯한 인테리어
용품들이 즐비하다.

"세상이 바뀌어 종업원들은 쉬고 업주들이 가게를 지키는 세상이야"

우리 사회도 많이 변하여 종업원이 상전이 된 셈이다. 철거작업중인 청계천 길을 걷
노라면 인도에 산더미를 이룬 갖가지 의류품들이 시골장터 주인을 기다라고 있다.
예전 같으면 인파들로 어깨가 부딪쳐 걷기조차 힘들 정도였는데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불황의 깊이가 피부로 느껴진다.

이것저것 두리번거리다가 어느덧 목적지인 황학동에 이른다. 이곳에 오기 위해 냉면
집을 잠시 경유했을 뿐이다.

벼룩시장에 가면 여러번 놀란다.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품목에
놀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것에 또 한번 놀란다. 인도 차도 할 것 없이
무단으로 벌려놓은 좌판의 갖가지 물건들이 인파와 범벅이 되어 활기가 넘친다.
낯선 이국인들도 서성이는 것으로 보아 이 곳이 제법 명소가된듯 싶다.

온갖 잡동사니와 사람이 어우러진 모습에서 사람 사는 맛을 느끼게 한다.
나도 그들 틈에서 이것저것 만져보며 웃음 꽃을 피운다. 정리 정돈이 잘된곳 보다
어수선하게 늘어놓은 곳에 더 정감이 간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깔려있어 어지럽
기도 하지만, 노숙자들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 같은 찌그러진 헌 구두, 냄새나는 헌
옷가지들, 얼룩진 그릇들, 도금이 벗겨진 액세서리, 또는 이국 풍물인 듯한 인테리어
장식품들, 더욱이 포르노 음화까지 없는 게 없다. 저런 넝마 속에서도 매니아들은 몇
백만원을 호가하는 골동품을 골라낸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벼룩시장은 프랑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벼룩시장이란 뜻으로 쓰이는 불어
'puces'는 '벼룩'과 '암갈색'이란 뜻이란다. 암갈색의 오래된 가구나 골동품을 뜻하
고, 벼룩은 이 사람 저 사람 몸으로 옮겨 다니기에, 물건들도 그렇게 벼룩처럼 옮겨
진다 하여 벼룩시장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이거 버버리 맞어?"
"글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중후한 차림새의 여인들이 등뒤에서 주고받는 말이다. 시선을 돌려보니 조금은 깔끔
해 보이는 검정단화를 손에 들고 여기저기 살피며 동행인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하다.
버버리 상표가 선명하게 보인다. 약속이나 한 듯, 남편과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지며

"저 단화는 버버리 맞나 봐. 잘 고른 것 같아"
"이 사람아. 여기 나오는 물건은 대부분 본드로 붙이고 약칠하여 눈 가림을 한 것들
이야"
"이 많은 물건들 공급원은 어딜까? 가정에서 버리는 쓰레기 방출이 공급원 일까?
쓸만한 물건들은 어쩌면 장물일지도 몰라"

청동을 입힌 가짜 일 것 같은 물건도 수북하고 장물일거라 짐작이 가는 물건도 많다.
불법 총기류까지 이곳에 제작 판매한다 하여 사회문제까지 야기시켰던 게 얼마 전
이지 않았던가? 때문에 외국에서는 벼룩시장에서 속지 않는 법을, 알뜰 구매를 위한
책자까지 발간하여 소비자에게 정보를 제공한다고 한다.

그림을 구입할 때는 반드시 뒷면을 살펴야 한다느니. 도자기는 원산지가 가까운 지역
에서는 그 가치가 알려져 있기 때문에 싸게 구입하기가 어렵다느니. 물건을 파는 사
람이 전문 장사꾼인지 아마추어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고. 대체로 물건이 가지
런히 진열돼 있고 같은 종류가 많으면 전문 장사꾼일 가능성이 높다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제대로 구입하기 위해서는 분별하는 능력도 필요한 것이니까 알아서 손해보는
일은 없다.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모씨는 재불기간 10년 동안 거의 한 주말도 거르
지 않고 벼룩시장을 섭렵한 덕분에 한국재불 화가의 작품을 싼 가격으로 구입하여 한
국에서 수 억원을 벌어 유학비용으로 충당했다는 믿기지 않는 일화도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잘만 이용하면 횡재를 할 수도 있다 하여 일명 도깨비 시장이라고도 불린다.

우린 딱히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려는 것도 아니고, 골동품이나 인테리어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부류는 더욱 아닌, 지난 세월의 향수에 취해보는 구경꾼 일 뿐이다.

벼룩시장의 물건들은 대체로 20년을 주기로 바뀐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결혼 혼수로
가져와 아직 쓰고 있는 제네랄 일렉트릭 다리미와 오스카 믹서는 벌써 십수년 전에
저 자리에 놓여졌어야 할 물건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난 아직 불편 없이 사용하고 있
고, 미놀타 소형 카메라는 버리지도 못한채 오히려 장농속에 깊숙히 간직하고 있으니
난 여기에서도 뒤쳐진 사람이지 싶어 묘한 기분이 든다.

 


-표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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