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듯' 사랑하고 기도하고 후회없이 살자

표주박의 散文노트

문을 열고

샘터 표주박 2003. 12. 14. 18:19




"운명에는 우연이 없다. 사람은 어떤 운명을 만나기 전에 제 스스로 그 것을
만든다" 라고 '우드로우 윌슨'은 말했다.

봉성체가 있는 날, 우리 구역은 아니지만 요셉 할아버지 댁을 방문하였다.
옥색 한복을 곱게 입으시고 향수를 뿌리신 듯 향기가 풍긴다. 성체를 영하는
모습이 긴 수염만 없다면 영락없는 미소년이다. 홀 시아버님을 수발하는 자매
님의 지극한 신심과 효성이 집안에 가득하다. 성찬 의식이 끝난 후, 신부님은
다음 환자를 위하여 자리를 뜨셨고. 동석했던 다른 자매가 외인 환자 방문을
권한다. 주저 없이 따라나섰더니 바로 아랫골목이다.

"계십니까? 성당에서 왔습니다"

반지하 문을 여니 물체를 식별할 수 없이 어둡고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누구세요"

가느다란 소리가 들리자 동행한 자매가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벽을 더듬으며
"스위치가 어디 있지요?" 하고 물었다.

"불을 꺼야 해요. 전기요금이 많이 나오면....."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주머니 얼굴이 보고 싶어서요"

견딜수 없는 악취와 꿉꿉한 어둠이 깔려있는 안방 문지방을 선뜻 넘지 못하고
주방과의 경계에 엉거주춤 쭈구리고 앉았다. 환자에 대한 예비지식 하나 없이
얼떨결에 따라나섰으므로 전혀 예상치 못한 참담한 처지는 내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숨쉬기 조차 괴로운 몇 분이 지나자 후각신경은 마비 되어 더 이상
악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누운 채 맥없는 눈빛으로 우리 일행을 바라보던 그녀는 오그라든 몸을 간신히
추수리며 일어나려 애를 쓴다. 간신히 움직여지는 한쪽 손으로 산발인 머리를
쓸어 올리며 우리 일행을 맞는다. 흑갈색에 가까운 안색은 여러가지 합병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언제부터 편찮으셨나요?"

손가락 세 개를 부자연스럽게 펼쳐 보인다. 경계의 눈빛을 보이더니 그녀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진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이내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듯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야기 들어 볼래요?"
"네. 말씀하세요"
"내 속을 털어놓은 적이 없는데 왠지 말하고 싶어지네요...."

우리도 한 줄의 편지 쓰고 싶은 날이 있듯이 그녀도 오늘이 그런 날 이었나
보다. 우리도 가슴깊이에 묻어둔 서리 맺힌 한을 풀어내고 싶은 때가 있듯,
그녀도 지금이 그런 순간인가 보다. 벌레만도, 먼지만도 못한 존재로 천대받은
상처를 풀어 헤친다. 때때로 격정적으로 흐느끼며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53년 간 품었던 한 스런 보따리를 풀고 또 풀어 낸다.
듣고만 있다가 한마디 끼어 들었더니..

"내 이야기를 다 들으세요...." 하며 오히려 역정을 낸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객혈을 하듯 토해내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선혈이 낭자
하다. 그녀의 피맺힌 절규에 가이 눌려 숨이 멎을 것만 같다.
그러기를 한시간 여... 나도 모르게 그녀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가 쏟아낸 검은 응어리를 손으로 쓸어 내며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께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 당신의 한을 풀어내도록
이끄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저희에겐 인자하신 어머님이 곁에 계십니다.
저희와 함께 기도해 주시는 성모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슬프지 않습니다.
수녀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 분께 오늘 못다하신 말씀을 다 풀어놓으세요.
많은 위로가 되실 겁니다"

내가 하는 열 마디 백 마디 보다 수녀님의 한마디 위로가 힘이 되어 줄 것
같았다. 검게 죽어있던 그녀의 얼굴에 바알간 홍조가 피어 오르고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약속한 대로 다음날, 원장수녀님께서 방문
하셨고 함께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

인생은 반전이다. 하느님은 그것을 그토록 원하셨으니. 이제로부터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 그녀의 소외된 운명을 바꿔 놓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예비
하신 하느님의 계획에 그녀의 명단은 처음부터 기록되어 있었다. 다만 동참하지
않았을 뿐... 이제 그녀의 마지막 삶의 반전은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

"운명에는 우연이 없다. 사람은 어떤 운명을 만나기 전에 제 스스로 그 것을
만든다" 라고 하지 않는가. 꿈은 이루어지듯, 소외된 자의 반전도 분명 이루어
질 것이다. 그녀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었기에....



-표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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