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듯' 사랑하고 기도하고 후회없이 살자

표주박의 散文노트

설날 스케치

샘터 표주박 2005. 2. 10. 16:38


설날 차례를 지내고 제기를 정리하는 손길이 바쁘다. 동서는 어느새 마른 행주질을 마쳤다. 예전 같으면 차례상을 물리고 세배도 받고 넉넉한 덕담으로 느긋하게 다과상도 마주하였을 터인데 이렇게 서둘러 뒷정리를 마치기도 처음이다. 설날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되는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 10주년 기념 2시 공연 관람권을 조카로 부터 선물 받았기 때문이다. 마음밭은 문화공간을 서성이지만 경제적인 부담을 먼저 따지다 보면 늘 기회를 놓지기 일쑤였는데 구정에 으뜸 선물을 받았다. 게다가 VIP석 옆에서 배우들의 미세한 호흡까지 읽어내며 관람 할 수 있는 좌석이니 그것마저 행운인 셈이다. 명절 날, 차례를 지내고 주부가 곧 바로 일어선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한 시간도 훨씬 전에 서둘러 출발하였건만 군자동에서 차가 잠시 밀릴 때는 혹여 늦으면 어쩌나하는 노파심에 마음이 조마조마 하였으나 이내 시원스레 뚫린 강남대로를 타고 공연장에 당도하니 30분의 여유가 있다. 오페라 하우스 로비에서 문화인 답게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장내로 들어갔다. 의외로 중후한 중년 부부들이 좌석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들이 정겹다.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서긴 했지만 젊은이들을 위한 공연이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역력했던 남편은 그제서야 어색함에서 벗어난 눈치다. 서곡과 함께 막이 오르고 1945년 8월 히로시마 상공의 거대한 버섯구름이 보인다. 무대가 밝아지면서 1896년 히로시마 지방법원의 민비 살해범 공판 장면이 투명 스크린으로 처리되어 무대효과를 발한다. 재판장의 심문이 있고. 피고 미우라와 공범들은 일본천황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다짐 할 뿐이다.... 물론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그들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는다. ....로 부터 전개된다. 회전 무대는 다양하고도 독특한 효과를 연출하여 많은 이야기를 함축해 나간다. 그뿐만 아니라 화려한 의상과 박진감 넘치는 안무에서 우리 민족의 얼과 기상과 정체성이 적절하게 표출된다. 강팍한 철옹성 늙은이 대원군. 유약한 약골의 무능한 고종. 무기력하게 몰려다니며 당파싸움질만을 일삼는 한심한 머저리 신하들... 그들 사이에서 미력하나마 왕권 회복을 위한 명성황후의 지략은 빛을 잃고... 끝나는 순간까지 우리 민족의 처연한 역사를 훑어내는 아픔에 시달려야만 했다. 風前燈火와 같은 國運의 쇠락이 가슴속에 서리서리 맺혀 핏발이 선다. 15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지도자들까지 추한 모습으로 엉크러져 뒷통수를 친다. 가장 처절했던 몰락의 역사를 민비의 悲歌에 담아내기에는 역사성에 대한 한계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절정은 무어라도 해도 일본의 검객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는 처참한 장면이다. 왕비의 시신은 불태워지고... 오! 하늘이여! 땅이여! 잿빛 하늘에서 내려오는 한줄기 황금빛에서 발하는 장엄한 코러스. 명성황후의 혼백이 뭇신하들을 대동하고서 울부짖는 '백성이여 일어나라' 가슴을 후린다. 틀림없이 장송곡이었을 게다. 내게는 분명..그렇게 들렸다. 가슴에 비수를 꽂아 숨결을 멎게 하였다가 다시금 거슬러 일어서게 하는- 분노의 뜨거움이 목까지 차오르고 눈자위를 통하여 분출되는 에너지를 보았다. 좋은 공연은 하루아침에 급조되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국내 제작진에 의해 4년간의 긴 준비 끝에 태어났다고. 그 후 10년간 580회의 공연과 77만 관객을 동원시켰다는 '명성황후'가 초연때와는 달리 크게 변화되었다고 한다. 해외 공연에 맞춰 대본은 물론 음역까지 주인공에 맞춰 편곡, 수정되었다고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진화한다. 이 작품도 10년 후엔 또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 지... 그 때, 다시 볼 수 있을런지? 남편 말에 의하면 마눌덕에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을 관람한 게 세번째란다. 문화적 소양을 쌓는 다는 거창함 보다는 우리나라 통곡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는 비장함 보다는 관심사가 다를지라도 기꺼이 동행해 주는 마음씀이 더 값지고 소중한 하루였다. 난~ 여자~ 이니까~ .......하하하~ 05/02/10 -표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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