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듯' 사랑하고 기도하고 후회없이 살자

표주박의 散文노트

어제가 길일이었답니다

샘터 표주박 2005. 2. 28. 09:31




지난 19일 정오 쯤,  남원으로 달리는 열차안에서 차창밖으로 흩날리는 
하얀 눈밭에 몽유병환자 처럼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데 손폰이 울린다.
"형님, 나 아네스... 
-응. 웬일이야~
"오늘 본당 대보름 척사대회라 형님이 주방 봉사하시지 싶어 형님도 볼 겸,  
일도 거들 겸, 성당에 왔는데 형님이 안보이네요. 집 전화도 안받고 해서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남원 가는 길이야. 내일 밤이나 되야 서울 갈텐데...무슨 일이지?...
"시골서 메주가 왔거든요. 그럼 월요일 아침에 다시 전화드릴께요"
해마다 김장이 끝나면 메주를 쒀서 띄우곤 하였는데 몇해전에는 이상하게도 
검은 곰팡이가 메주를 휘감더니 그 해 된장맛은 실패였다.  그 이후 부터는 
번거로운 메주띄우기를 포기하고 손맛이 좋기로 이름난 아네스에게 부탁하였
더니 시골 친정언니가 해마다 이맘때면 메주를 보내준다. 작년엔 언니네 콩 
작황이 좋지 않아 한 해 걸르고 올해는 두말을 보내 온 것이다. 
시골에 연고가 없는 나로서는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장을 망쳐버린 그해에도 메주를 두말 쑤었다. 햇볕에 잘 말린 후, 라면 박스에 
넣어 보관하였는데 검은 옷을 입은 것이 예사롭지 않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된장에도 검은 곰팡이 위력이 대단하였다.  
흰콩을 삶아 콩과 콩물을 섞어 한 여름 뙤약볕에 일광욕을 시키니 곰팡이는 
다소 줄어들었지만 된장 빛깔이 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장맛을 되살려 보고 싶은 욕심에 다음해 봄에 개량 메주와 고추씨를 섞어 
보아도 도통 예년 맛을 살릴 수는 없었다. 
이것 저것 섞어 놓으니 두말이던 된장이 불어나 엄청 많아 졌다. 
내 입맛에 맞지 않지만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까워서 된장 뚝배기 집을 운영
하는 큰 아들 친구 엄마 율리아나에게 된장 맛을 보여주었다. 쓸만하면 몽땅 
주겠다 했더니 사서 쓰는 된장과 비교될바 아니라고 어찌나 좋아 하던지....
요즈음은 재래 간장은 그다지 많이 쓰지 않지만 미역국을 끓이거나 나물을 
볶을때는 아무래도 조선 간장이 조금이라도 들어가야 제맛이 난다. 
한번 먹어보면 모두들 탐내는 된장. 그 때문에 해마다 장을 담근다. 
약속한 월요일 아침,  
전화벨이 울리는가 싶더니 성질 급한 아네스가 어느새 메주 두말을 손수레에 
끌고 왔다.
-내가 가지러 갈텐데 새벽부터 저 무거운 것을 끌고 왔네. 부지런도 해라...
"오늘 제가 바뻐서요. 형님은 무거워서 못끌고 와요. 좋아하시는 시래기도 
한줄 갖고 왔으니 보름에 쓰세요.
-언니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우리 친정 어머님이 27일에 장을 담그래요. 말날이라고...
-호호호...알았어...
어머님 말씀대로 말날에 담글께. 그게 뭐 어려운가. 
지리산 방문기념(?)으로 들고 온 고로쇠 수액과 한려수도 청정해역에서
생산된 미역과 다시마를 메주를 싣고온 바구니에 담았다. 
고로쇠 수액은 하루에 20리터를 다 마셔야 효험이 있다는데 그 많은 양을 
하루에 다 먹기도 힘들거니와 체액처럼 미끈미끈하여 혀끝이 받아들이지를 
않아 한병만 샘플로 가져왔다.  아네스도 고로쇠 수액이 몸에 좋다는 말은 
들었지만 먹어본 적은 없다기에 맛이나 보라고 들려 보냈다.
정월 대보름도 지나고 드디어 27일이 말날. 吉日이다.
이틀전, 영하의 바람이 거센 옥상에 올라가 소금물을 풀어 준비해 두었다.
메주도 정갈하게 씻어 햇볕을 쏘이며 장담글 준비를 마쳤다 . 말날인 어제, 
배부른 장항아리에 차곡차곡 메주를 넣고 투명하게 가라앉힌 소금물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부었다. 
40일 후를 기약하며 빨간 고추와 대추와 숯도 띄우고...
                                         05/02/28
                                         -표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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