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듯' 사랑하고 기도하고 후회없이 살자

오늘이 마지막이듯

염수정 서울대교구장의 삶과 신앙

샘터 표주박 2014. 1. 18. 10:16

 

 

염수정 서울대교구장의 삶과 신앙

 

    친화력ㆍ추진력 겸비한 '준비된 교구장'
    잉태 때부터 주님께 봉헌… 두 동생도 사제의 길
    박해 피해 옹기 굽던 4대조 염석태 1850년 순교
    축구ㆍ테니스ㆍ수영ㆍ등산 즐기는 만능 스포츠맨
    넓은 포용력ㆍ소탈한 성품 지닌 사제들의 '맏형' 


10일 제14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된 염수정 대주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과 교황님 뜻에 순명해 교구장직을 받아들이겠다"며 '두렵고 떨린다'는 자신의 심정을 먼저 피력했다. 염 대주교의 교구장 임명은 2002년 주교품을 받고 교구 총대리로 봉직한 지 꼭 10년 만이다.
 
 임명 발표 이튿날인 11일 저녁 경기도 분당구 정자동 큰형 염수운(루카, 79, 분당 성마태오본당)씨 집에 모인 가족들은 "교구장 임명 소식을 접하자마자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은총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다"면서 염 대주교가 서울대교구장이라는 중책을 잘 수행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 1983년 염 대주교 부친 염한진옹 삼우재를 마치고 찍은 가족사진. 왼쪽 두번째가 염 대주교. 맨 왼쪽은 동생 염수완 신부, 맨 오른쪽은 막내동생 염수의 신부.



#옹기장이와 숯쟁이 신앙의 순교자 집안 출신
 염수정 대주교는 1943년 경기도 안성에서 아버지 염한진(갈리스도, 1908~1983)과 어머니 백금월(수산나, 1908~1995) 사이에서 5남 3녀 중 여섯째(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염 대주교 집안이 천주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한국교회 초기 무렵 신앙을 받아들인 파주(坡州) 염씨 15세손 의암공 염덕순(요셉, 1768~1827)공 때부터다. 염덕순공은 염 대주교 5대조다.
 
 염 대주교 4대조인 염석태(베드로, 1794~1850)공은 충북 진천에서 옹기를 굽는 '사기장골'에 살면서 아내 김 마리아와 함께 수계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집안은 이때부터 옹기를 구워 팔며 박해시절을 견뎌냈다. 1850년 5월 중순, 사기장골에 천주교 신자가 집단으로 거주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부는 포졸들에게 체포돼 순교하고, 자녀를 비롯한 남은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염 대주교 부친은 그의 아버지(염재원 요한) 때부터 경기도 안성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진천을 떠나 안성으로 이사를 간 것은 가족이 늘면서 옹기를 구울 점토가 부족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염 대주교 고향이 안성인 것도 이 때문이다.
 
 염 대주교 어머니는 신심 깊은 할머니(박 막달레나) 영향으로 매일 조과ㆍ만과(아침ㆍ저녁기도)를 빼먹지 않았고 '첫 첨례 5ㆍ6ㆍ7'을 모두 지키며 살았다. 첫 첨례 5는 매월 첫 목요일 성직ㆍ수도자를 지향으로, 첫 첨례 6은 매월 첫 금요일 예수성심을 지향으로, 첫 첨례 7은 매월 첫 토요일 성모 마리아를 지향으로 미사와 고해성사, 영성체를 하는 신심행위를 말한다.
 
 어머니 백 여사는 염 대주교를 임신한 순간부터 '아들이면 사제가, 딸이면 수녀가 되도록 성모님께 바치겠다'고 남몰래 기도해왔다. 그래서 염 대주교가 성신고등학교(소신학교)에 진학했을 때와 1970년 사제품을 받았을 때 가장 기뻐했던 이가 바로 어머니다.
 
 이러한 사실은 백 여사와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단 한 번도 "사제가 되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고,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 여사의 정성 어린 기도는 염 대주교가 사제품을 받은 1970년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막내 염수의 신부가 1981년 사제품을 받던 그날 저녁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비로소 "세 아들이 모두 사제가 되기를 기도해왔다"고 밝혔다.
 
 큰형 염수운씨는 "신심이 깊으셨던 할머니께서는 어머니에게 '너희 대에서 사제가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주교님을 잉태한 뒤부터 막내가 수품하는 날까지 38년간의 기도 덕분에 주교님을 비롯한 세 명의 아우가 사제가 된 것 같다"고 감격스러워했다.
 
 염 대주교는 염씨 일가 가운데 첫 번째 사제다. 동생 염수완(서울 문정동본당 주임)ㆍ염수의(서울 잠원동본당 주임) 신부도 그를 이어 사제가 됨으로써 그의 가문은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삼형제 사제'를 낸 성소 못자리가 됐다.
 친척으로는 김순진(서울대교구, 1992년 수품)ㆍ염동규(살레시오회, 1992년 수품) 신부가 있고, 손자뻘로는 염영섭(예수회, 1997년 수품) 신부가 있다.



 

▲ 염 대주교가 2006년 12월 비둘기 재활센터에서 성탄미사를 집전한 후 장애인들에게 덕담을 건네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사제 꿈꿔 온 '범생이'
 염 대주교 가족은 "주교님은 일생을 '사제'라는 외길을 걸어온 분"이라고 말했다. 둘째 형 염수용(요한 세례자, 74, 서울 오금동본당)씨는 "주교님은 어린 시절에도 친구들과 싸움 한 번 하는 것을 보지 못했을 정도로 유순하고 모범적으로 살았다"고 회고했다.
 
 염 대주교 가족은 안성에서 농사를 짓고 살 때 6ㆍ25전쟁이 발발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초등학생 시절 염 대주교는 형들과 함께 시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노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안성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서울 청운초등학교로 전학했을 때는 반에서 1~2등을 했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기도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 영향으로 가족은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가족이 모두 둘러앉아 매일 아침ㆍ저녁 기도와 묵주기도 5단을 바쳤다. 염 대주교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동성중학교 재학 시절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다 「경향잡지」에서 소신학교(성신고등학교) 입학 안내문을 발견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염 대주교가 성신고등학교 3학년 때 동기생 10여 명이 밤 '대침묵' 시간을 틈타 교사식당을 털어 마음껏 먹고 마시다 들통이 난 사건이 있었다. 신학생들이 대침묵을 어긴 데다 음식물을 무단 절도한 큰 사건이어서 관련 학생들이 모두 퇴학을 당했지만, 원칙대로 대침묵을 지킨 염 대주교는 대신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그는 또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하다. 신학생 시절부터 축구를 무척 좋아했고, 수영과 테니스ㆍ스키에도 일가견이 있다. 사제가 된 뒤에도 등산과 테니스 등을 즐겼다.
 
 명동본당 정연섭 보좌신부는 "얼마 전 명동성당 종합계획 공사를 위해 테니스장을 헐기 직전 마지막으로 후배 신부들과 함께 테니스를 치셨다"며 "한참 나이 어린 신부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시며 땀 흘리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고 말했다.


 

▲ 1970년 12월 13일 후암동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염 대주교.



#친화력과 추진력 갖춘 사제
 염 대주교의 둘도 없는 장점은 친화력이다. 주교이지만 최창화(교구 특수사목담당 교구장 대리) 몬시뇰 등 동기 사제들과 여전히 격의 없이 어울린다. 후배 사제들과도 스마트폰으로 '카카오톡'을 날리며 지낼 정도다. 주교 권위를 내세운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염 대주교는 친화력을 바탕으로 협력자를 모아 일을 추진해나가는 능력이 뛰어나다. 교회와 관련된 일이라면 고집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일에 매진한다. 현재 맡고 있는 주요 직책만 10개가 넘는다. 최근에는 서소문 순교성지 개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가족들은 염 대주교가 일하느라 몸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안타까워했다. 염수용씨는 "교구 사무처장 시절 어느 여름날, 덥수룩한 머리에 면도하는 것도 잊은 채 일하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웠다"며 "검은색 상의에 허옇게 소금이 내려앉은 모습을 보고 '그렇게 일을 해야만 합니까?'하고 물은 적이 있을 정도"라고 회고했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며 자상한 마음씨를 지닌 염 대주교는 이주노동자 무료 진료소인 '라파엘 클리닉'을 자주 찾아 의료진을 격려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의 아픔을 품어 안아주기도 했다. 많은 신자들은 염 대주교가 본당 주임신부와 총대리 주교 시절 만나는 이들마다 환한 웃음으로 손을 잡아주던 모습과, 심포지엄 같은 행사에서는 끝까지 남아 필기하면서 귀를 기울이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염 대주교는 또 항상 기도하는 사제다. 후배 신부들을 만나면 "부족한 사람이 주교가 돼 하느님께 송구스럽다"면서 늘 기도 속에서 하느님 도우심을 청했다. 지난 3월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주관으로 제주도에서 열린 '하느님의 종 125위 시복시성 기원 제주 도보성지순례'에 참석했을 때는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아 귀감이 됐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기도습관이 평생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학교 동기 최창화 몬시뇰은 "염수정 대주교님은 한마디로 준비된 교구장으로, 신앙을 비롯한 좋은 의미에서 고집이 센 분"이라며 서울대교구 사제와 수도자ㆍ신자 모두가 대주교님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했다.

 

▲ 11일 분당 큰형 염수운씨 집에 모인 염 대주교 가족들. 맨 오른쪽에 큰형 염수운씨가 지인들로부터 축하전화를 받고 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

              

 

 

 

 

'오늘이 마지막이듯'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환 추기경님 5주기  (0) 2014.02.15
설날입니다.  (0) 2014.01.30
경축! 새 추기경 서임!  (0) 2014.01.13
Adieu...2013...!!  (0) 2013.12.30
주교회의 담화문  (0) 2013.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