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듯' 사랑하고 기도하고 후회없이 살자

표주박의 散文노트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

샘터 표주박 2002. 6. 12. 19:24

 

 

 

 

"나도 당신 따라가야지"
라는 한마디에 힘을 얻어 다음날 서둘러 오전 10시평일 미사에 우리 가족을 봉헌하고 명동카톨릭 회관을 찾았다.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악의 세력이 비집고 들어와 흔들릴 것 같기에 확실하게 매듭을 짓고 싶었기 때문이다. 담당자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듣고 안내 책자와 신청서를 받아왔다.


우리부부는 늦게 자녀를 두어 학업 중에 있는 아들 둘이 있다.
큰 녀석은 사회참여에도 눈길을 돌려 NGO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하며, 전공보다는 다른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기에 대체로 귀가시간이 늦는 편이다. 작은 아들은 인터넷 사업, 이를테면 벤처 사업을 추진하느라 3년째 학업도 뒤로 미룬채 동분서주하고 있다. 우리둘보다 두 녀석이 더 바쁜관계로 바오로와 둘이서 안내 책자를 꼼꼼히 숙지하고 거기에 실려있는 기도를 바치고 경건한 마음으로 장기기증서에 서명을 하였다. 서로 보증인이 되어 지장을 꾹꾹 찍으니 이것으로 하느님과의 장기기증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시신기증은 절차가 하나 더 남아 있다. 본인 이외의 가족 두명의 서명이 필수 이므로 아이들이 들어오면 작성하리라 생각하며 감사 기도를 바쳤다.


자정이 다 되어 귀가한 큰 아들에게 안내 책자를 건네주며 충분히 읽어 본 후 서명해 달라고 말했다. 느닷없이 불쑥 내민 책자에 눈길이 멈추더니 충격을 받은 듯 한참 말머리를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기에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너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오래 전부터 준비를 했었어. 아버지께서 동의를 해 주지 않아 10여년을 미루었는데 이젠 아버지도 동참해 주시니 너도 함께 해다오. 그리고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들이 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말을 가로막는다


"잠깐 제 말씀부터 들으셔요. 장기기증과 시신기증에 관한 필요성은 익히 잘 알고 있으며, 결심하시게 된 동기와 취지에 대한 설명도 더 이상 않으셔도 됩니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 주신 것에 대해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요. 저도 언젠가는 부모님과 뜻을 같이 할 겁니다.. 그러나 동생 S가 먼저 서명을 하고 난 후에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먼저 서명을 하면 동생 S에게 묵시적인 압력이 될 수도 있으니 S의 의견을 존중한 후 제가 서명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바오로로 부터 어렵게 동의를 받아 냈기에 아이들은 당연히 동의 해 주리라 생각했는데 예기치 못한 큰아들의 태도에 당혹했다. 그러나 한편, 장남으로서 부모의 사후에 관한 일이니 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동생의 의견도 들어보지 않은 채 서둘러 서명하는 건 순서가 아니라 생각하는 것 또한 신중한 태도라 자위하며, 오히려 대견하다 싶기도 하고, 큰아들은 매사에 사리가 분명하고 논리가 정연하고,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날카로우므로 오히려 이런 태도가 믿음직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겠구나. 그러면 S에게 먼저 동의를 얻고 난 다음에 해다오......."



이런 상념으로 서운한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나절 잿빛하늘 사이로 빗줄기를 뿌리더니 이내 파아란 하늘을 드러내며 햇살이 펴질 무렵 작은 녀석이 3일만에 집에 들어왔다. 샤워하고 나오는 아들에게 문제의 그 책자를 내밀며 서두를 꺼냈다.


"어머니. 제가 천천히 읽어볼게요"

하며 책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내가 잘못 키웠어. 부모가 무얼 원하는지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녀석들!
부모보다 친구를 더 챙기는 녀석! 못난 녀석!`

순간 서운한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작은 아들 S는 3년 전 친구들과 더불어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바오로는 학업을 마치고 사업을 해도 늦지 않으니 학업이 우선이라고 극구 반대를 하였고, 나는 배(아들)를 만들었으면 삶의 바다에 던져 놓아야 한다며 은근히 아들을 거들어 주었다.
이 시대의 빠른 물결을 헤쳐나감에 있어 젊은이들의 창조적인 도전과 자립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판단되어, 다섯 녀석들의 똘똘 뭉친 의지를 꺾을 수만은 없었다.더욱이 정보화시대에 살고 있는 녀석들이 그 쪽으로 시각을 넓힌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기에, 바오로의 적절한 지적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늘 안절부절하며, 오히려 조심스레 아들 편에 서서 대변하곤 했다.


부모의 도움 없이 맨손으로, 오로지 젊음과 패기만으로 시작한 일이었기에, 넘어야 할 언덕과 극복해야 할 난제는 수없이 밀려왔고, 자기네들 스스로 해결해야만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에 부모로서 도와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 외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한때는, 사업설명회를 통해 투자자들로 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테헤란로 일대가 무너진다는 소리가 매스컴을 통하여 들리더니, 급기야 인터넷 웹사이트 무료계정이 셀수도 없이 문을 닫는 광경을 지켜보며, 아들에게도 심각성이 도래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아침 식탁에 앉는 아들의 얼굴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게 되었을 즈음,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한녀석이 개인적인 욕망을 앞세워 회사를 돌이킬 수 없는 궁지로 몰아 넣고 말았다. 결국 그 일로 다섯 녀석들의 마음이 갈리어 둘은 떠났다. 다섯이 하던 일을 셋이 감당하느라 며칠씩 밤샘작업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부모와의 대화까지도 거의 단절된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뒤늦게 알고 부터는 정신적 물적 손해를 입힌 그녀석이 예전처럼 보여질리 없었고, 오히려 부모에게 전말을 덮으려한 어리석은 아들이 한없이 모자라게만 보여 아들을 나무라는 에미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오히려 그 녀석을 감싸며 친구의 우정만은 지속하고 싶다고 말하니, 손익계산에도 밝지 못하고 현실적이지도 못한 아들의 장래가 지극히 염려스럽기까지 했다.
친구는 기천만원을 도용해 자신의 결혼자금으로 유용했는데도, 이녀석은 3년 넘도록 아침마다 에미에게 차비까지도 손을 벌리고 있으니 한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속은 또 오죽하랴 싶기도 해서.


"모든 일에는 시행착오는 있게 마련이다. 그런 것이 없다면 노력 할 필요도 없고 도전할 이유도 없지 않겠니.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고 생각하고 이젠 학업에 전염해 보렴..."


위로와 격려를 해 주면서도 마음이 편할리 없고 늘 무거운 쇠뭉치를 매달고 있었다. 아들은 점점 말이 없어지고 야근을 밥먹듯이 하더니만 테헤란로에서 변두리로 사무실을 옮겼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며칠만에 꺼칠한 모습으로 들어와 잠을 자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며 두시간 째 서성이고 있다. 이것저것 읽을 거리를 펼쳐 놓기도 하고 컴퓨터에 올라오는 글을 살피기도 하고 쿵당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음악을 틀어 보기도 하지만 영 진정되지 않고 안절부절이다.
이름석자 쓰고 손도장 하나 꾹 눌러 주는 게 무에 그리 어려운지 한 달이 넘도록 뜸을 드리고 있으니 부모가 원하는 일에 성의도 없고 관심조차도 없는 것 같아 야속한 마음이 움찔 움찔 머리를 든다. 이러다가 바오로가 번복하는 날엔 지금까지 공들여 놓은 탑이 무너질까 걱정이 되었다.
행여 물거품이 될까 노심초사 걱정하고 있는 내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큰 녀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S와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요 부모님의 뜻 충분히 알고 있지만 3년 동안 속만 썩혀 드렸기 때문에 지금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대요. 믿음직한 아들 모습으로, 기쁜 마음으로 해 드리고 싶대요. 조그마한 일을 다시 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아니, 정리를 한다고 들었는데 또 일을 시작했다고? 아버지께는 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니...."


"저도 염려가 되어 여러 각도로 분석을 해 봤는데 이번 일은 잘 될거 같아요. 제가 먼저 서명해 드릴 테니 마음 편히 가지세요. 하지만 S가 끝 까지 서명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겁니다."



큰아들로 부터 서명을 받아 둔지도 보름정도 지났다. 야간작업을 하고 아침녘에 들어와 깊은 잠에 빠지더니 점심때도 저녁때도 아닌 시각에 부스스 일어나 한술뜨고 있다. 꼴이 말이 아니다. 게다가 커피 한잔 다 마시도록 한마디도 건네지 않고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친구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있으니 미운 생각마저 들었다.
바오로에게 아이를 저떻게 키웠느냐고 또 추궁을 당해야 할 일이 정말 걱정이다. 제 스스로 선택한 일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는 거라고 누누이 일러두었지만 그 말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말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싶어 아들 방을 노크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불쑥 종이쪽지와 인주를 내밀며


"엄마는 돈으로 효도하는 거 바라지도 않아. 돈이 삶의 전부는 아니야. 인간이 먼저 되야돼. 넌 아직 학생이니까 실패를 해도 절반은 성공한거나 다름없어.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생각하면 억울할 것도 없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잖니. 다만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는 게 자식된 도리야. 오늘 엄마 생일인데 너 그러고 다니느라고 몰랐지? 에미에게 이세상에서 가장 뜻깊은 선물을 해 다오."


오늘이 에미 생일이라는 말에 잠시 움찔 하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해 드릴께요. 제가 떳떳하지 못해서........ 이다음에라도 후회가 될까봐........."

말끝을 흐리며 서명을 하고 지장을 찍었다.
종이를 받아들고 아들방을 나서며 문을 닫으려는 순간.......아들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달려들어가 젖먹일 때처럼 아들의 얼굴을 와락 끌어안고 목놓아 울었다.


    [하느님 아버지,
    이 죄인용서 하소서.
    이토록 착한 당신의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사오니
    당신께서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하느님 아버지,
    몇 달 동안 이 아들을 몹시 미워했습니다.
    애비, 에미보다 친구를 더 중히 여긴다고
    이 착한 아들 가슴을 마구 헤집고
    마구 쥐어 뜯었습니다.
    이 못난 에미를 용서 해 주소서

    하느님 아버지,
    아들의 마음속에 이 에미는 없는 줄 알았는데
    이토록 뜨거운 사랑을 감추고 있었군요.
    오늘 이 시간 당신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나를 낳아 준 내 어머니를 위해 난 아직
    이토록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는데
    이 아들은 이 못난 어미를 생각하며
    이렇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
    제가 마지막 이 세상을 떠날 제
    이 아들이 이토록 울겠지요.

    하느님 아버지
    오늘 당신은 제게
    가장 값진 생일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진정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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