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가정을 가진 여자라면 다 그러하듯 아침시간은 늘 바쁘다. 남편과 아들이 출근하자마자 컴퓨터에 전원을 넣고 어제밤 자정이 지나 칼럼에 올린 90호 글을 다시 한번 점검한다.
[독자의 한마디]에 올라온 오정순님의 "55세의 증언"을 막 읽으려는데 따르릉....벨이 울린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오늘 M형님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 낼 수 있어? 그 이야기는 하지말고, 안부도 묻지 말고, 그저 편안한 이야기만 하자 ---그래. 가슴아픈 상처는 건드리지 말아야해. ===10시 40분까지 장안동성당 정문에서 만나자.
이것저것 정리하다 말고 현관문을 나선 시간이 10시 40분이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빈 택시가 우회전을 하려는 듯 내 앞으로 방향을 튼다. 반사적으로 손들 들어 정차시키고 택시에 오른다.
---장안동성당까지 부탁합니다. 가는 길 아시지요? ===네 ---아~ 교우시군요. 묵주가 있네요. 반갑습니다. ===저는 신내동 성당나갑니다 ---장안동으로 이사간 교우를 만나기로 했는데 늦었어요.
어제 내린 봄비 몇 방울이 땅을 적시더니 제법 쌀쌀하다. 좌회전 우회전 능숙하게 달린다. 차창에서 멀어지는 눈에 익은 건물들도 가로수에 질세라 각각의 표정으로 시린 봄내음을 물고 있다.
---가장 가까운 지점 큰길가에 내려 주세요 ===제법 걸어야 하니까 성당 앞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은 골목길도 들어가고 싶답니다
11시 5분. 약속시간보다 무려 25분이나 늦었다. 성당 어느 곳에도 A와 M은 없다. 핸드백속에 있어야 할 수첩도 없다. 얼굴이 후끈 달아 오른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011-740-6...???... 핸드폰 뚜껑을 닫는다. 다시 열고 011-740-9***???.... 어쩌지???....
입력된 우리집 전화번호 1번을 누른다. 받지 않는다.
다시 2209-**** 큰 녀석 방, 번호를 눌러본다. 굵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휴~ 살았다!!
---수첩을 집에 두고 나왔거든. 전화번호부에서 *** 바뀐 휴대폰 번호 찾아 주렴.
정보화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다. 첨단 IT 산업에 발맞춰 생활 패턴이 다양해지고 편리해 지긴 했지만, 나는 아직도 수동식에 더 익숙해져 있으므로 각종 전자식기기 사용법을 척척 익힌다는 것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닐수 없다.
전화번호만 해도 그렇다. 우리집 전화번호는 20년째 그대로 이다. 그러나 주변의 친척과 친지들은 거의 새번호로, 국번도 세자리에서 네자리로 바뀌었다.
게다가 남녀노소 할것 없이 대부분 휴대폰을 지니고 다닌다. 초등생이 가장 선호하는 선물이 휴대폰이란다. 휴대폰 10자리 숫자가 내 머리에 입력될 즈음이면, 이번엔 첨단 소재로 새로운 기능이 업그레이된 신형으로 교체했다며 다른 번호를 일러준다.
어디 그 뿐이랴... 이번엔... 속속... 탈 서울을 하므로 바뀐 번호에 지역번호까지 몇자리 더 얹어 보탠다
하루가 다르게 퇴보하는 내 암기력으로는 10자리가 넘게 나열된 숫자를 바뀔때 마다 암기 한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통화중에 불러준 번호를 메모지에 적어놓았다 한들 수첩에, 휴대폰에, 제때에 정리하지 않으면 오늘 처럼 난처한 일을 겪게 되는 것이다.
쌀쌀한 날씨에 70을 넘기신 M형님이 추워하실 것 같아 길에서 우왕좌왕 하느니 새로 이사도 하였고, 연락도 가능한 집으로 막 들어섰단다. 매사에 사려 깊은 A의 배려이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한 사람도, 조금 더 기다리지 못한 사람도, 서로의 늙음을 바라보며 웃음꽃을 피운다
---우리 영화 보러가요. 아침에 메일이 왔는데 제목이...Beautiful mind...??? ===제목도 확실히 모르고, 극장도 모르면서? ---요즘 세상에 컴퓨터 없는 집은 이집 뿐이네요. 나가다가 PC방에 들러 컴을 열어보면 돼. 아니...울 아들 아직 집에 있나?
---응. 엄만데. 오늘 아침에 ***님 메일 얼핏 읽다가 왔거든 멜 열어보고 그 분이 추천한 영화제목 알려 줄래? 여긴 장안동이니까 관람하기 편한 극장도 알아봐 주렴.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 'Beautiful mind' 좋은 영화예요.
영화관 몇 군데와 "Beautiful mind"에 관한 간략한 정보까지 잊지 않고 들려준다
이윽고 매표소에서 표를 끊는다 앞사람이 매표원과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3시 30분이요?' 하며 물러난다.
---Beautiful mind 지금 시간에 볼수 있는 표 3장 주세요.
입장권 3장을 받아든다. 서둘러 집을 나서다 보니 돋보기를 챙기지 못했다. 이맛살을 그어가며 간신히 읽어낸 것이 6관 37. 38. 39번.... 매표원이 2시 40분이라 했으니 10분의 여유가 있다.
안내 표지판 지시에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니 의아스럽게도 좁은 통로를 따라 2개 층을 다시 내려가란다.
2층으로 다시 내려 갈거라면 '2층에 엘리베이터를 세워 주던가, 애초부터 걸어서 올려보내지' 투덜대며 계단을 내려온다. 6관 입구에서 예쁜 아가씨가 고운 미소로 입장권을 확인한다.
---어? 입장권이 없어졌네. 분명 내가 갖고 있었지? ===주머니에 넣었나 잘 살펴봐. 아니면 화장실에서 흘렸나 보다.
휴게실 의자에 앉아 급한 마음으로 핸드백 소지품을 모두 꺼낸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다. 이를 어쩐다... 다시 확인해 본다. 핸드백 밑창에서 입장권을 발견한다....
---얘가 왜 여기에 숨어 있는 거야!!!... 휴~~
썰렁한 객석, 더듬더듬 37. 38. 39번. 셋이 나란히 앉는다 예고편이 화면을 메우고 여름에 상영될 에니메이션까지 친절히 보여준다. 안중근이 나오고, 이또오 히로부미가 암살되고, 일본어 대사가 어설프다. 고막을 찢는 총성, 동시에 선혈이 솟구친다. 눈을 가린다. 잔인한 액션에 오금이 조여든다.
---웬 예고편이 이리 길지? 우리가 잘 못 들어온 건가? ===글쎄...이상해...여기가 6관 맞지? ---나가서 확인해야 겠어.
방음 처리된 두터운 문을 밀치고, 다시 4층으로 올라간다. 무전기를 손에 든 안내원이 배치되어 있다.
---Beautiful mind는 언제 하지요? ===입장권을 보여 주세요. ---여기 있어요. ===매표소에서 Beautiful mind라고 얘기했는데도 이걸 주던가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확인해 볼께요. ---우린 여태까지 다른 영화를 본겁니까? ===네...제가 상영관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3시 30분 상영이니까 지금 가셔도 늦지 않습니다.
불이 켜지고...우리들 눈엔 감동이 흥건하다. 사랑...연민...이란 두 단어를 번갈아 되뇌인다. 진정한 사랑은..연민이며..연민은..인간 승리의 휴먼 드라마이므로...
어스름한 어둠이 깔리고, 발걸음은 어느새 지하철역 계단을 밟고 있다.
청구역을 지날때 B에게 전화를 건다.
---나 지금 지하철 5호선 왕십리를 통과하고 있어. 20분 후엔 도착하거든. 한방통닭 한마리 주문해 주렴. ===아저씨가 퇴근하실 시간인데 봄바람 났군. 아저씨한테 일러야지. ---호호호...그래...라~ 따끈한 한방통닭에 참이슬 한병이면 끝내주지 뭘 그러니?
느긋하게 걷는 일행에게 눈을 질끈 감아 미안함을 표한다. 먼저가라 손짓 한다. 잰걸음으로 서둘러 B가 운영하는 란제리 가게에 들어선다. 방금 배달된 따끈한 한방통닭 꾸러미를 보온용 비닐로 겹겹이 싸맨다.
---내가 늦었네...오늘 봄바람 쐬었거든요. ===목요일이라 교리반에 갔나 했지. ---다음주 부터 시작이예요. 이렇게...술안주...안고...왔다구요~ 있잖아요 오늘....하하...호호...ㅎ
-표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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