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5일째,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한 탈진 상태.
그 날도 오전근무를 마치고 집 근처 병원에 입원을하기 위해 지하철
가파른 계단을 난간에 의지하며 내려왔다. 얼마간이라도 고통을 덜어 보려는
긴박감에 택시를 탈까? 망서리기도 하였으나 멀미까지 겹치면, 행여 긴
차량행렬에 갇히기라도 하면 더욱 힘들것 같아 차라리 지하철이 낫겠다 싶었다.
검불 하나 움켜 쥘 힘도 없다. 역내로 진입하는 열차의 금속성 신호음,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과 진동에 휩쓸릴 것 같이 다리가 휘청거린다.
열차 안으로 들어 섰지만 앉을 자리가 없다. 바닥에라도 몸을 허물어 눕고
싶다. 한 정류장 지나 군자 환승역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린다.
저쪽 노약자석 양쪽에 4자리가 비어 있다. 서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으므로
그쪽으로 가서 앉았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긴다. 누군가 왼쪽 빈 자리에
앉으며 앞가슴을 누른다. 여자의 깁스한 팔이 안경 밑으로 어렴풋이 보인다.
뒤이어 누군가 내 앞에 우뚝 멈춰 서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눈을 떠
살펴 볼 기력조차 없어 그냥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열차가 출발 하는가 싶었는데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상한 예감에 무거운 눈을 들어 쳐다보니 내 앞에 기골이 장대한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험상궂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거친 말을 한다.
나는 반사적으로 무릎 위에 있는 가방을 부둥켜 안고 일어서려고 하였으나
그 남자는 두 손으로 내 어깨를 떠밀어 주저앉힌다.
"당신 몇 살이야. 내가 앉고 싶어서가 아니고. 젊은 사람이 건방지게...."
나를 향해 턱을 올렸다 내렸다 속사포를 쏘아대고 있다.
졸지에 당한 일이라 할 말을 찾지도 못한 채 그저 멍청히 바라볼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안경을 코에 걸칠 힘도 없었지만 누런 병색을 조금이나마 감추려고 챙겨 쓴
안경을 벗고, 퀭한 눈을 들어 긴 소매로 가린 링커와 영양제 주사로
얼룩진 팔뚝을 드러내 보였다.
"어르신님. 제 얼굴을 좀 보세요. 이 팔도 보세요. 저는 환자입니다.
어르신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조금이나마 죄송스럽던 마음도 없어졌습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전했다.
그리도 당당하던 그는 미안 했던지.....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내린다.
군자역에서 갈아탄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진다.
병원침대에 누워 영양제와 진정제 주사를 꽂고 다시 눈을 감는다.
"어서 기운 차려야지..."
죄송하다는 말을 들었건만 눈물이 주루룩 흐른다.
노약자 석에 앉았다하여, 자신보다 몇 살 덜 먹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여자에게까지 욕설에 가까운 말로 호통 치는 것은 언어폭력이다.
노약자 석이란 노인과 장애인, 몸이 아픈사람, 임산부, 등의 약자를 위해
마련된 좌석이다. 노인만의 전용이 아니다.
노약자 석이라 하여 입원 환자나 다름없는 상태에서도 자리를 비워두고
서서 가는 게 미덕이고 예절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젊은이라도 몸이 아프면 비어 있는 노약자 석에 앉을 수도 있다.
노인이라도 장애인이나 임산부에게 노약자 석을 양보할 수도 있다
물론, 노약자 석을 비워두자는 취지는 어르신들을 공경하자는 마음에서,
장애인이나 임산부 등을 우선 배려하자는 뜻에서 비롯 되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뜻과 취지를 공감하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다.
어른 공경이 어디 노약자 석 뿐이겠는가. 일반 석에서도 주위를 살펴보고
어르신이 서 계시면 자리를 양보하는 게 당연지사이고 대부분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 어른을 섬기는 게 아니고 노인들에게 봉변 당하지
않으려고 양보한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장애인이나 노약자가 아닌 젊은 청년이라도 몸이 아플 땐 마음놓고 자리에
앉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도 그 청년을 바라보는 시선이
'몸이 몹시 좋지 않은가 보구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배려...
노인들에게도 그런 따스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서로 존중하는 사회는
그런 배려에서 부터 싹이 자란다.
사람과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통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어우러진
감사와 배려의 지하철 문화...요원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