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초, 절친한 친구 A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 오늘 서명했어"
-응? 무슨 서명....
"용기가 없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미루어 오던 장기기증 말이야"
-잘했어! 장한 결정을 했어!
우리 육신이 쓰임을 다 한 후 땅에 묻어 흙이 되느니 필요한 사람에게 생명을 이어 주는 거 장한 일이야. 나도 오래 전부터 동참하고 싶었는데 바오로가 동의를 해 주지 않아서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어.
배우자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부부가 함께 뜻을 모은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A씨가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 까지 했다.
십 여 년 전 한마음 한몸 운동의 일환으로 장기기증 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난 이미 주님 사랑에 동참하리라...마음을 굳히고 남편 바오로의 의중을 몇 번 떠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이 사람아... 내게 시집와서 호강은 커녕 고생만 시켰는데 당신 몸에서 안구를 빼는 걸 어찌 보란 말이야. 안돼!"
몇 차례 설득 해 보았지만 번번히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였다. 하느님이 불러주시는 시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데 말이다. 언젠가는 때가 오겠지 하고 막연하게나마 기도의 작은 촛불을 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일상에 쫓기다 보니 절실하던 그 마음도 점차 엷어지고 절절하던 소망마저도 점차 잊혀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A와 만남이 있은 후, 실로 우연히 우리 부부와 A부부, 그리고 B부부가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참이슬 뚜껑이 서너개 열리고 친교의 잔이 몇 순배 돌고, 이런 저런 세상사는 이야기가 무르익을 즈음, 남편 바오로의 안색을 살피며 자연스레...다분히 의도적으로 A에게 그 이야기를 건냈다.
-시신기증까지 했다면서요?
"응."
-아저씨도 오래 전에 하셨다고 들었는데...
"저 양반은 초창기에 이미 서명을 했고 나도 같은 생각이었으나 선듯 실천에 옮기지 못했는데 이번에 마음을 굳혔어"
눈이 휘둥그래진 바오로가 A씨 장부에게 잔을 권하며 끼어 들었다.
-신앙심이 대단하시네요.
"아니요. 저는 신앙심이 없습니다. 제가 십 여년 전 결심하게 된 동기는 아들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한 심적 동요로 시신기증을 했으니 신앙심이라 말할수는 없지요. 아들 딸이 잘 되길 바라는 오직 한 마음으로 청계천 바닥을 누볐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모든게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 능력이 부족하여 물질로 이웃을 돕는데 소홀하였고, 생업 때문에 시간십일조도 못했으니 주님께서 주신 이 한 몸, 사후에라도 꼭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때의 동기는 신앙심 이라기 보다는 아들에 대한 실망감이 저를 그 길로 이끌었는데 십 여년이 지나 다시 생각해 봐도 잘한 결정 같습니다."
-그게 어디 신앙심 없이 되는 일입니까?
"글쎄요...."
자녀를 키워본 부모라면 누구나 몇 번쯤은 자녀교육의 두텁고 높은 벽을 느껴 보기도했겠지만, A부부는 인간의 높은 사명을 자각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삶의 원칙과 튼튼한 신념을 심어주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들에게 매우 헌신적 이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생명을 주신 그 분 뜻이다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편해. 사는 날까지 오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분 곁으로 떠나면 되는 거 아니겠니?"
-그럼... 시신기증 후... 사후 절차는 어찌되지?
"의대생들의 용도가 끝난 후 수습하여 용인 천주교 공원 묘지내 카톨릭대학교 참사랑 묘역에 안치된대"
A의 말이 끝나자 바오로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이때다 싶어 나즈막한 소리로...혼자서 중얼거렸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인데....
"이 사람이 왜 이러나..."
그 일이있고 며칠 지나 우리 부부는 저녁 식사 후 찻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바오로의 기분을 살피며 조심스레 또 말문을 열었다.
-나도 A처럼 하고 싶은데...허락해 주면....
"그렇게도 그 일이 하고 싶어? 죽어서도 옆에 묻히고 싶도록 A가 좋아?"
-뜻을 함께하고 싶다는 거지요. 십 여년 전부터 허락해 달라고 했잖아요. 난 지금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거든요. 유언이라도 남기면 사후에라도 들어 줄건가요?
"허허허. 이 사람...
당신이 그토록 원하는 길인데....어찌 당신 혼자 보내겠나. 그럼.... 나도 따라 가야지!"
-정말이예요? 고마워요! 내일 당장 서류 꾸밀께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찬미영광 받으시옵소서!]
받으시옵소서 / 최민순 신부
"받으시옵소서
황금과 유황과 몰약은 아니라도
여기 육신이 있습니다.
영혼이 있습니다.
본시 없었던 나 손수 지어 주시고
죽었던 나 몸소 살려 주셨으니
받으시옵소서.
님으로 말미암은 이 생명, 이 사랑,
오직 당신 것이오니 도로 받으시옵소서.
갈마드는 세월에 삶이 비록 고달팠고
어리석은 탐욕에 마음은 흐렸을망정
님이 주신 생명이야 늙을 줄이 있으리까.
심어 주신 사랑이야 금 갈 줄이 있으리까.
받으시옵소서.
당신의 것을 도고 받으시옵소서.
가멸고 거룩해야 바칠 수 있다면
영원히 둘이라도 할수 없는 몸
이 욕망, 이 더러움 어찌 하오리까.
이 가난, 이 더러움 어찌 하오리까.
님께 바칠 내 것이라곤
이 밖에 또 없사오니
받으시옵소서. 받으시옵소서.
가난한 채, 더러운 채,
이대로 나를 바쳐 드리옴은
오로지 님을 굳이 믿음이오니
전능하신 자비 안에 이 몸이 안겨질 때
주홍 같은 나의 죄, 눈같이 희게 만드사
생병 밝히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한마음 한몸 운동에 대하여....
89년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제 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계기로 한국 천주교가 성체성사의 깊은 뜻을 실제 삶과 연결시켜 생활안에서 실천하려는 한마음 한몸 운동의 일환으로 사후 안구 기증과 장기기증을, 더 나아가서 시신기증을 접수하였습니다.
성체 성사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 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동참함으로서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여 생명세상을 만들어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나눔 운동입니다. 또한 신심운동이요, 생활실천 운동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마지막 피 한방울 까지 바치셨습니다. 오늘도 그 분께서는 미사를 통하여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들 차례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시는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본 받아 우리도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일부를 내어 주고자 하는 것이 한마음 한 몸 장기기증운동의 근본정신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하여 기증할 수 있는 것에는 뇌사시에만 가능한 심장, 간, 폐, 신장, 췌장, 막막이 있고 사후에는 안구와 시신기증이 가능하며, 생존시는 헌혈과 조혈모 세포(골수)를 기증하실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장기기증이라 부릅니다.
-표주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