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하나...억새꽃 왕관 어느 시인의 시어처럼 초록이 지쳐 나무들이 온통 원색으로 곱게 치장을 하고. 마지막 정염을 불태우는 붉으디 붉은 단풍잎에 비추는 햇살이 눈부시다. 가을산은 단풍으로 시작하고 억새로 마무리한단다. 은빛 깃이 너울대는 억새를 만나러 네 여자가 명성산을 찾았다. 상가도 아닌 주택도 아닌 어색한 사잇길을 따라 오르니 이름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줄지어 산자락을 에우고, 원색 분칠로 요염을 흘리고 있었다. 이내 제법 험악한 바위 위로 투박하게 엮어진 볼품 없는 철다리가 눈에 걸리고 물소리도 제법 시끄러이 존재를 알린다. 펑퍼짐한 바위 위에서 떨어지는 하얀 물줄기가 沼를 향해 곤두박질 치며 부끄러이 가느다란 몸매를 펼쳐 보인다. 물이 맑았더라면 이 작은 물줄기일지라도 아름답다 쓰다듬어 주었을 텐데 희뿌옇게 흐려진 까닭은 왜일까? 선홍색으로 물든 단풍잎 몇장 흩어진 투명한 푸른 沼.... 그 위로 하얗게 부숴지는 물줄기의 어우러짐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밖에.. 두 눈을 감고 나이도 잊은채, 지나온 세월도 잊은채, 단풍잎으로 연지곤지 단장하고 물소리에 발을 맞춰 꿈길을 걸어 볼까나.. 몇 순배 가쁜 숨길을 몰아 쉬니 어느 듯 하늘거리는 은빛 억새가 기다렸다는 듯 우리 일행을 향해 목례를 한다. 소슬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능선의 어깨 춤은 단풍 못지 않게 가히 환상적 이다. 갈색추억을 선사하는 억새 은빛 속살은 또 다른 가을 정취를 안겨 주는 계절의 환호가 아닐 수 없다. 가을 빛, 억새 빛, 햇살이 사방팔방으로 펼쳐진 언덕에 올라 하얀 억새꽃 왕관을 뺏어 쓰고 이 계절의 왕비되어, 이 계절의 끝자락에 서 있어 볼까나.. 은빛 깃털이야 내 머리와 비슷해 왕관이 아니야 해질 무렵 붉은 울음 금빛 분가루 털어 내는 억새... 우수수 소리를 내며 파도처럼 출렁이는 억새의 환희에서 침잠된 우수가 엿 보인다. 쓸쓸한 바람 타고 언덕을 넘는 가을의 속울음이 들린다. 파란 가을하늘 하얗게 물들인 은빛 너울에 감추인 으악새의 메마른 연주... ♤ 이야기 둘....억새 머슴의 전설 옛날 억새라는 이름의 머슴이 살고 있었다. 그 억새의 주인은 인색하기로 유명한 선비였는데 어느 날 억새를 데리고 먼길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도록 점심을 먹을 생각을 안더니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자 비로소 억새에게 팥죽을 한 그릇 사오도록 시켰다. 팥죽 한 그릇이라면 억새에게 차례가 오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아무리 인색한 주인이더라도 너무하다고 생각한 억새는 팥죽을 사왔는데 그릇이 아닌 요강에 담아 왔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양반의 체면에 요강에 담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는지라 그 팥죽 한 그릇은 억새의 차지가 되었다. 다시 한참을 가다 이번에는 생굴을 파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이번에도 선비는 체면에 직접 가서 사먹을 수는 없어서 한참을 가다가 억새에게 되돌아가 생굴 한 대접을 사오도록 하였다. 이번에는 요강이 아닌 대접에 사 올 것을 당부하였다. 다시 배고픈 머슴을 굶기고 혼자 한 그릇만 먹겠다는 주인에게 심술이 난 억새는 생굴을 요강 아닌 대접에 담이 오기는 하였는데 그냥 오지 않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으면서 오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묻는 주인에게 가져오다가 자기의 콧물을 빠뜨려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 물론 이 생굴 한 대접 역시 억새의 차지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땅에 자라는 풀 억새와 머슴 억새가 많이 닮은것 같다. 천하고 심술궂지만 살아가는 모습이 왠지 밉지 않고 정다운 머슴 억새. 들에, 산에, 이 땅의 척박한 땅 어느 곳에서든 뿌리를 뻗어 잘도 자라는 풀. 시골 개구쟁이들이 산과 들을 헤매다 산딸기라도 따 먹을랴 치면 그 꼬지지한 종아리를 가차없이 할퀴기도 했겠지만, 그 빳빳한 잎새의 서슬이 누구에게든 고분고분 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래도 넉넉한 가을 들녘을 일렁여 주는 억새.. 한 아름 꺾어다 집안 한 귀퉁이에 꽂아 두고 싶은 억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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