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물레
그리운 시절이기도 하지만 가난했기에 더욱 추웠던 아픈 조각들... 어스름 달빛이 흡수된 유리창에 회색빛 차거움이 투영되어 심지를 타고 흐르다 가느다란 불꼬리 생명으로 살아나 어둔 하늘에 흔적을 남기며 아기별 처럼 초롱이고 있다 휘황 찬란한 어지러운 네온과 형형색색의 현란한 조명으로 휘감긴 도심은 그 옛날 등잔불의 존재쯤은 뭍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밀어내고 있기에... 어느 날 홀연히 흐릿한 불빛의 꼬리가 타임캡슐을 열고 날아와 잊었던 세월의 퇴적층을 밀어내고 살아있는 존재로 지난 날을 되새김질 하고있다 움직이는 생명으로, 귀뚜라미의 울음주머니를 꿰이고 깊은 심연에 잠긴 달 그림자 가르며 유영하는 외로운 지느러미에 하얀 燈 하나 매달고 구월 품으로 미끄러진다 지금은 강원도 두메 산골 첩첩산중에도 송전탑이 세워져 칠흑 같은 밤은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래이고 동네 어귀부터 가로등이 훤히 지켜주고 있다. 텔레비전의 흔들리는 파란 파장도 밝은 조명아래 숨어 들어 그 옛날의 아련한 등잔불의 소묘일랑은 어쩌면 밝은 전깃불에 바래버린 낡은 그림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60년대 초반만 해도 전력사정은 여의치 않아 수도서울도 매일 밤 몇 차례씩 정전이 거듭되었고 그나마도 자정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제한 송전으로 인하여 어둠에 묻히었으므로 제법 높은 선반에 등잔이나 호롱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은 필수였다 등잔의 용기래야 고작 작은 접시에 들기름을 붓고 무명 심지를 얹어 불을 붙여 쓰기도 했고 도자기로 제대로 빚은 등잔에 솜으로 꼰 굵은 심지를 꽂아 밝히기도 했으며 들기름 대신 냄새나는 석유를 양철 등잔에 부어 사용하기도 했다. 불을 밝히는 등잔의 위치는 매우 중요했다. 손이 닿지 않는 한쪽 켠에 등잔대를 세워둘 자리가 따로 있었고 아이들이 많은 집에서는 선반을 매달아 지정된 장소에 벽으로부터 일정거리를 띄우고 늘 조심스레 점검하곤 했다. 늦은 밤 공부하기 위해 등잔불을 책상이나 머리맡에 내려놓았다가 스르르 빠져 버린 잠결에 손끝이 밀리어 슬쩍 스치기만 해도 온 가족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재난을 당할 위기도 수 차례 넘기기도 했으며 어디 그 뿐인가 꾸벅 꾸벅 졸다가 앞머리를 태우는 일쯤은 다반사였다 후에 세련된 유리 호롱을 씌운 남포라는 것이 출현하여 생활의 조도를 밝혀 주기도 했다. 유리호롱을 등잔에 씌워 심지를 위 아래로 쉽게 조절할 수 있어 심지만 돋아주면 온 방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고 반대로 낮추면 조금 남은 기름으로도 어스름한 새벽 달빛이 스밀때 까지 기나긴 겨울밤의 스산한 차가움을 따스한 빛으로 포근히 감싸주기도 했다 찐득한 석유 그을음으로 더럽혀진 호롱을 수세미에 비누칠하여 정갈하게 닦아주기만 하면 늘 환한 정겨움으로 우리의 볼을 부벼 주었고 남포가 걸린 천정 주변은 호롱 끝을 타고 오른 그을음으로 멋진 추상 수묵화를 제 뜻대로 그려놓기도 했었다 천한 사람, 귀한 사람 차별 없이 평등하게 밝혀 주던 등잔불... 밤이 이슥해지면 아이들은 어느듯 잠이 들고 심지를 낮춘 희미한 등잔불 아래 어머니의 바느질 한 뜸 한 뜸에 무거운 눈꺼풀이 내릴 즈음 힘없는 가느다란 입김에도 등잔불은 잘도 흔들리며 자취를 감추곤 했다. 지나온 갈피에 애틋한 서정의 꼬리로 그려내고픈 그림들이다 삭막한 순례 길 소멸될 수 없는 어둠의 사슬이 깃든 이곳 마르지 않은 기름 한 방울 보탤 수만 있다면 오롯한 마음의 불씨하나 던질 수만 있다면 조촐한 내 작은 정원이 나를 향한 기쁨으로 출렁일 것을 사랑의 불빛으로 충만할 수 있을 것을.... TV 사극에서 대감나리의 밤 행차에나 양반집 안방마님의 밤 행차에는 어김없이 하인이 등불로 밤길을 밝혀 준다. 때로는 관가에서 포졸들이 횃불을 들고 중죄인을 찾아 샅샅이 누비는 모습도 흔히보는 화면이다 그 뿐인가... 지금도 농촌 어느 어느 마을에서는 어른 아이 어우러져 등불이나 횃불을 들고 개울에서 가재나 게를 잡으러 돌을 들추는 동심도 방영되곤 했다 이렇듯.... 등잔불, 등불, 횃불.... 그 쓰임은 다르지만 내 마음에 소중한 한 가닥 소망 세상을 밝히는 등불에 세상은 밝아지고! 방안을 밝히는 등잔불에 집안이 밝아지고! |
'표주박의 散文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겸손의 땅, 용서의 땅 (0) | 2003.04.28 |
---|---|
억새꽃 왕관 (0) | 2003.04.21 |
물고기와 새의 대화 (0) | 2003.04.18 |
비...그리고 추억 (0) | 2003.04.18 |
사랑의 완성 과정 (0) | 2003.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