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꽃 피는 유월이 오면 또 한송이의 꽃 나의 모란 추억은 아름다워 밉도록 아름다워 해마다 해마다 유월을 안고 피는 꽃 또 한송이의 또 한송이의 나의 모란... 김용호 시인의 말처럼 추억은 아름답다. 정말 밉도록 아름답다. 아카시아 향내가 아직 코끝에 남아 있는데, 나뭇가지에 걸린 흔적들이 조각이불처럼 알록달록한 얼굴을 내밀며 유월의 푸른 뜨락을 서성인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은 조용하고 청초한 모란의 수줍음이, 듬직하고 널찍한 어깨를 스치고 곰삭여진 그리움으로 저편 언덕에 소슬이 고여있다. 디지틀 부호로 변환된 '또 한송이의 모란' 소릿결이 저녁 강물처럼 잔잔하다. 모란이 입술을 벙그는 시절에 풋 마음 소란이던 여섯 계절 그 뒤척인 붉은 자리. 착지를 잃은 이슬방울 삼키며 소소리바람 등에 업힌 세월의 굽이는 끝끝내 애달픔만 키웠어라. 눈밭에 스러진 향기없는 모란은 여직, 그리운 자락을 물고 있구나.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무심히 흐르는 강가에서 종이배 띄워 틔우지 못한 풀씨를 담는다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하며.. 이규보(李奎報)의 折花行. 牡丹含露眞珠顆 진주 이슬 머금은 모란꽃을 美人折得窓前過 미인이 꺾어들고 창 앞을 지나며 含笑問檀郞 살짝 웃음띠고 낭군에게 묻기를 花强妾貌强 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檀郞故相戱 낭군이 짐짓 장난을 섞어서 强道花枝好 꽃이 당신보다 더 예쁘구려. 美人妬花勝 미인은 그 말 듣고 토라져서 踏破花枝道 꽃을 밟아 뭉개며 말하기를 花若勝於妾 꽃이 저보다 더 예쁘시거든 今宵花同宿 오늘밤은 꽃이랑 주무세요.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기지 않으려 모란 꽃잎을 뭉개고 짓밟는 투기는 당당함이다. 앵도라진 교태는 남정네의 눈빛을 휘저어 섞는다 '꽃이 나보다 더 예쁘면 꽃이랑 자라' 세상의 남정네들, 이 미인의 품을 물리칠 수는 없으리!! 5월에 피기 시작하여 초 여름까지 아름다운 자태를 뿜어내는 모란은 장미와 더불어 꽃의 여왕이라 대접받아 불교 헌공화로 쓰이기도 했다. 일명 목단(牡丹)이라고도 하여, 12달을 상징하는 화투장에는 장미를 밀어내고 6월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장미보다 꽃송이가 크고 아름답지만, 뜰에서 볼 수 없는 까닭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모란도'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 아닐까. 당 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모란도와 씨앗을 보내왔단다. 이를 본 선덕여왕은 대뜸, "꽃은 비록 고우나 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 라고 하였다. 싹을 틔워 꽃을 피워 보았으나 과연 향기가 없었다. 배우자가 없음을 조롱한 당 태종의 비아냥을 간파하였다는 일화이다 모란도에는 벌, 나비가 없다. 고전시문에도 향기없는 모란 일색이다. 하지만 당나라 이정봉은 "밤이라 깊은 향기 옷에 물들고 아침이라 고운 얼굴 酒氣올랐네" 라 노래 하였으니 향기가 전혀 없지는 않은듯 싶다. 잎의 풍성함과 꽃잎의 착상으로 미루어 '길흉화복'을 점치기도 하였다는 모란. 한때는 國花로 중국을 상징하였으며, 붉은 모란은 한약재로도 쓰였다는 모란....... 김용호는 추억의 꽃으로 김영랑은 기다림의 꽃으로 이규보는 투기의 대상으로 읊은, 만년설에 고이 묻힌 나의 꽃잎 한 장... 시인의 말처럼, '추억은 아름답다. 정말 밉도록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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