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동 벼룩시장에 갈 때는 편한 차림이 최고다. 차림새에 신경을 쓸 필요가없다. 찌든 먼지더께도 상품이므로 깨끗한 손수건이나 챙긴 숄터백을 어깨에걸치면 그만이다. 가끔 눈이라도 부빌때 필요하니까. 이 얼마나 편한가. 보물찾기하듯 구석구석 살피다 행여 쓸만한 게 눈에 걸리면 흥정하는 맛도 솔솔한 반면,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놓쳐버린 물건은 오랫동안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의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십사오년 전, 신학교 앞에서 수녀님과 만나 성모병원에 입원하신 신부님을 문병 가기로 하였다. 나는 30여분이나 먼저 도착하였기에 혜화동 성당 건너편 서원에서 신간을 뒤적이고 있었다. 우연히 고개를 들어 시선이 머문 곳, 예수성심상과 성모상 한 쌍이 시야에확 박힌다. 흔히 볼 수 있는 그런류가 아닌, 전혀 다른 품위가 돋보이는, 예사 로운 성물이 아님이 첫 눈에 느껴진다. 홀린 사람처럼 그 앞에 섰다. "얼마인가요?" "이태리 수입품이라 좀 비싼데요. 25만원입니다" "....." 남편의 거듭되는 건강 악화로 어려움이 많을 때이므로 그토록 고가품(?)을 구입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왠지 그냥 돌아서면 평생 후회할 것 같기에 지갑을 몽땅 털기로 마음을 먹었다. "예수성심상만 주실 수 있나요?" 뜻하지 않게 귀품있는 예수성심상을 차지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요셉 형제님께서 솜씨를 발휘하여 좌대를 제작하여 주셨고, 그 날 이후로는 누가 뭐래도 우리 집 가보 제 1호로 공인 받게 되었다. 우리가족이 바치는 기도의 중심엔 늘 그분이 계셨고, 하느님과의 만남 횟수도 늘었다. 그로부터 십년이나 지난 어느 날, 얇은 지갑으로 인하여 떼어놓은 성모상을 황학동에서 만났다. 조잡한 청동 소품들 속에서, 아프리카 추장의 험상궂은 가면들 속에서, 그 특유의 고아한 자태로 두 팔을 벌리고 나를 품어 주시려는 듯... 내가 당신을 버렸는데도 변함 없는 그 미소 그대로다. 도대체 저 귀한 물건이 뉘 손에 의하여 여기까지 왔을가? "저 성모상 얼맙니까?" "칠 만원만 내세요. 아주 귀한 겁니다. 이태리 대리석 조각이고요...." 이곳에서 칠 만원이면 상당히 비싸다는 생각에 나는 또 살까 말까를 망설인다. 내 거동을 살피던 바오로가 손을 잡아끈다. 우리 집 성모상이 더 좋다나... 그 날 이후, 황학동에 갈 때마다 그 곳을 습관처럼 서성이지만 이미 자취를 감춘 성모상은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오래도록 아쉬움이 남는다. '나보다 신앙심이 더 깊은 분'의 기도 도구로 쓰일 거라 위안을 하며 발길을 돌린다. 헌 책 몇 권이 실린 1톤 화물차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소록도 강길웅 신부님의 '낭만에 초쳐먹는 소리'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뒹굴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수녀님께서 추천해 주신 도서가 아니었던가. "이거 얼맙니까?" "천원만 내세요" 하! 천원!. 얼른 건네주고 책을 받아 먼지를 털어 낸다. 청계천 8가에서 동묘 쪽으로 접어들었다. 숭인동에서 50번 버스를 타기 위한 정례코스이다. 종로 쪽으로 거의 왔을 때, 걸개에 걸린 카키색 숄더백을 만져 본다. 통가죽을 오려 레이스처럼 엮은 수제품인데 만원만 내란다. 가죽 이음새가 끊어진 채 삐죽 내민 것이 흠이다. 싼 맛에 샀다가 버린 일도 있기에 제자리에 걸어두고 자리를 뜨려는데 황토색의 똘망똘망한 1단 묵주가 눈에 띈다. 정교한 무늬는 조각한 것처럼 돋보였고 손때도 묻지 않았다. "이거 얼마죠?" "3천원입니다. 저 가방 통가죽이 아니면 제가 열 곱으로 갚아 드리겠습니다" 묵주 값을 물었는데 그새 숄더백을 집어들고 내게로 다가온다. 참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본드로 붙이면 감쪽같다는 설명까지 해 주며 내 손에 쥐어주는데 오른쪽 손가락이 오그라진 장애자가 아닌가. "오천 원에 드릴게요" 순간, 저 손으로는 접착제로 눈가림도 할 수 없기에 이렇게 해서라도 팔려고 하지 싶었다. "아저씨. 묵주와 가방 주세요. 거스름돈은 그냥 두시 구요" -표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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