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능 중에서 가장 우선인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먹는 즐거움이라고 했다.
신께서 하루에 세 번씩이나 그 풍요를 허락해 주셨으니 이 어찌 값진 선물이
아니겠는가. 한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말이다. 가장 큰 축복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혹자는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는냐?로 고민을 하지만 아무튼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음식문화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닌, 행복지수를 높이는
'윤택한 삶의 발견'이 아닐까.
아는 사람 중에 시쳇말로 '영감님'으로 잘 키운 아들 덕에 목에 깁스를 하고
며느릿감을 물색하던 이가 있었다. 그 댁 며느리가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놀랍게도
"내 아들은, 나 처럼. 아침 밥 챙겨 먹이는 여자" 이었다.
오로지, 잘난 아들의 아침 밥 챙겨 주는 역할만을 힘주어 강조하는 걸 보면
필시 찬모로만 처박아 둘 게 분명해 보였다.
잘 키운 아들 앞세워 세속의 Key를 넘봐도 문제겠지만 그니 처럼 남의 귀한
딸을 잘난 아들의 밥상으로 보는 천박함도 측은해 보인다.
아들의 행복이 물 건너가는 소리가 들리니까 말이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어느 명사님 댁을 방문하였다. 화가인 그녀와 이런
저런 삶의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레 아침 식단으로 옮겨갔다. 친정 어머님이
살림을 맡아 주실 때는 이른 새벽에도 거한 식탁을 마련해 놓으시고 살가운
혈육들이 일어나 맛나게 먹어 주기만을 기다렸는데 어머님이 떠나시고 난 후,
어쩔 수 없이 인절미와 우유와 과일로 아침을 해결 한단다.
처음엔 적응이 쉽지 않았으나 습관이 되니 별 어려움 없이 하루를 여는데
익숙해 졌노라고 실토를 한다.
주부도 집을 나서면 사회인으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은 쉬임없이 변화의 물결로 요동을 친다.
이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은 도태 뒬 수 밖에 없음에, 너 나 할 것 없이 파도
타기 곡예를 마다하지 않고 삶을 일구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걷는 것이다.
여느 시어머니의 바램처럼, 아침을 거하게 차려내는 것으로 만족하던 후한
점수는 옛말이 되었다.
년전만 하여도 인절미로 아침을 대신하는 것이 앞서가는 이의 생활패턴이라고
여겼던 일들이 이젠 대부분의 가정에서도 보편화 되어졌다.
나는 2년 전 부터는 아침마다 죽을 끓인다.
지독한 애주가인 남편 속 풀이를 위해 국에 밥을 넣고 뭉근한 불에 8~10분
정도 끓인다.
남편은 워낙 소식이므로 끓인 밥 반공기. 주스 반컵. 알약 두개가 아침식사
전부다. 명란젓으로도 끓이고 생새우를 다져서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기도
한다. 콩물을 내어 콩죽도 쑨다. 잣이나 호도 해바라기 씨도 좋은 재료다.
때로는 두꺼운 냄비에 밥을 펴고 노릇하게 누린 누룽지의 구수한 맛으로
전날 알콜에 시달린 위벽을 자극하지 않으려 부드럽게 상차림을 한다
우리 집도 네식구가 정한 시간에. 식탁에 모여 앉기가 올 여름의 햇볕 보기
만큼이나, 별 보기만큼이나 어렵다.
식성도 각기 달라 함께 모여 앉는다 한들 앞앞에 놓이는 음식이 다르게 마련
이다.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죽을 물밥이라며 기를 쓰고 거부하였으니
아침 식탁은 따로따로다.
아침을 거르고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30%에 달한다고 한다.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 아들도 그 대열에 끼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아침 식사가 인체에 미치는 소중함을 뉘라서 모르겠냐만 아침잠 5분의 꿈맛
꼬리를 자르지 못한 빈속을 식사 배달 전문업체가 맡는 현실이니 합리적인
사고로 시류를 따르는 현자의 지혜가 필요하다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변함없이 국을 끓이고 죽을 끓인다.
남편을, 아이들을, 빈속으로 내보내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사랑의 이름으로...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끓이고 또 끓인다.
-표주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