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음악콩쿠르에서 입상한 중학생에게 기자가 물었다 "학과성적도 우수해 초등학교 때는 전국수학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다지요. 존경하는 사람은?" "저예요" 철없는 아이의 당돌한 말이겠거니 하고 흘려 버릴 수도 있지만.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순진함이 귀엽다고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 수도 있지만 기사를 접했을 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당돌하다'는 말에는 의례 '건방지다'가 따라 다닌다. 정도가 심하면 "당돌하고 시건방지다"는 비속어로 불쾌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당돌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꺼리거나 어려워함이 없이 올 차고 도랑도랑하다.' 시건방지다는-- '당치 않게 젠체하며 비위에 거슬리게 주제넘다.' 당돌하고 시건방지다-- '꺼리거나 어려워함이 없이 비위에 거슬리게 주제넘다.' 로 정리가 된다. 여중생이 거침없이 "나를 존경한다"라고 말 할 수 있음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시대의 흐름에 적응 못하는 탓으로 돌리기엔 지극히 혼란스럽다. 우리 어렸을 시절에도 '당돌하고 시건방'을 떠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토록 어린 학생에까지 '시건방'이 침범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대중 매체 앞에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자기표현이 아닐 수 없다. 가정은 예절습득의 첫 교육장이다. 독일에서는 지식교육은 학교에서 전념하고 예절교육은 가정에서 맡는다 라는 인식이 사회전반에 깔려있다고 한다. 때문에 학교는 아이들의 버릇 고치기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버릇이 고약한 아이는 가정교육에 책임을 물어 퇴학처분의 대상이 된다고 들었다. 반듯한 예절(에티켓과 매너)은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윤활유이다. 에티켓이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할 행동규범이라면 매너는 에티켓을 지키는 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고가 우선이므로 폐를 끼치지 않는 행동거지가 출발점이다. 절제된 겸손과 바른 언행은 열린 마음과 배려를 가꾼 터에서만 아름답게 피워내는 꽃이다. 이 꽃을 많이 소유한 사람은 상대방으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음은 자명한 이치이다. 어느날 남편이 있을 때 통화를 하였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무엇을 그리 잘못 했기에 그토록 머리를 조아리느냐고 따진다.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게 자존심은 커녕 비굴하게 보인다고 혹독한 일침을 가한다. 견해 차이를 좁히려 애 쓰는 내 모양새에 울화가 치밀었나 보다. "겸손은 매너이고 인격이다." 라고 해명을 하였지만 영 소태 맛이다. 내가 빚어낸 말속에는, 때론 의무감에 사로 잡혀 지나치게 낮은 포복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때가 있었지 싶다. 썩 내키지 않아도 그냥 좋은 게 좋으니까 하는 식으로. 하지만 꼭이 그랬어야만 했을까하는 회의에 사로잡힐 때도 종종 있었으니 터무니없는 지적만은 아닌듯하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귀에 걸림이 없다는, 인생을 내다 볼 줄 안다는 나이에 이르러 "자신을 존경한다"고 나서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당돌한 것 같으니... 무엄하게. 어찌 감히..." 라는 비아냥거림이 등뒤에서 들려온다면, 이 또한 잘 살아낸 삶은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서나 견해의 차이는 상존한다. 그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 진심이 소통되는 배려의 터에서 화음을 연주하며 살아가는 일이 삶의 지혜일 것이다. 오늘, 낮은 자리에 피어나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 하였나... 깊이 생각해 본다. -표주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