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성체가 있는 날이다. 자매 님 몇 분과 요셉 할아버지 댁에서 신부님 오시기를 기다리는데 M자매 님이 십자고상 옆에 걸린 상본을 가리키며 "저 성모 님을 모시고 싶은데 구할 수가 없어" "영원한 도움의 성모 님이 마음에 드세요? 제가 판넬화 한 점 드릴게요" M자매 님은 십오육년 전에 위암 진단으로 위절제수술을 받았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가랑잎처럼 가벼운 체중에 의지하여 평일 미사참례와 레지오 주회를 궐하지 않는 신심 두터운 분이다. 하지만 소진된 체력은 신앙심과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조금만 걸어도 힘들어하시기에 골목어귀에 서 계시게 하고 나는 잰걸음으로 집안으로 들어와 구석에 걸려있는 그림을 챙긴다. 'MADRE DI DIO IGDREVSKAJA. Scuola di Novgorod. Sec.XV.' '이고레프스키야의 성모(15세기)' 라는 활자도 선명하게 찍혀있고 보관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영원한 도움의 모자상'과 비슷하여 오래 전에 구입해 두었던 것인데 M자매 님을 드리려고 자세히 살펴보니 짙고 굵은 선으로 처리된 눈망울에서 수심이 배어 나온다. 흔한 그림은 아니지만, 가뜩이나 건강에 염려가 많으신 분께 어두운 눈빛의 그림을 드리기가 망설여진다. 이미 약속은 하였으니 안방에 걸린 '영원한 도움의 성모' 액자를 내려 먼지를 닦고 M자매 님이 계신 곳으로 갔다. "판넬화는 귀한 거라 이걸로 드릴게요"라는 너스레도 덤으로 얹어 드렸더니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 상본 이야. 고마워." 매우 흡족해 하신다. 이십년 가까이 우리가족과 함께 기도해 주신 상본의 성모님이 이제부터는 M자매님 가정을 지켜 주시리라... "성모님!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흰색 갈색 검정색 페인트로 집안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여기 저기 조심스레 펴 바른다. 얼룩진 커튼이 눈에 거슬려 문갑 위에 올라서서 까치발을 딛고 고리를 풀어내리는데 늘어진 커튼 자락에 무엇이 걸리는 듯 싶더니...이를 어쩐다.... 연갈색 망토를 입은 파티마 성모상이 1m아래 방바닥으로 떨어져 두동 강이 났다.바로 그 위에 성모상본이 걸렸던 자리도 아직 비어있는데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며칠 사이에 우리집 안방 제대를 지켜주시던 두 성모 님이 수난을 당하신 셈이다. 내가 기쁠 땐 환하게 미소를 짓고 내가 우울할 땐 어둔 표정으로 내 부족한 기도를 도와주며 위로해 주던 상본과 성모상이었는데, 나의 불찰로 생명을 잃은 것 같은 느낌... 암흑 속에서 누군가를 향해 칼을 휘두른다. 뾰족한 칼끝으로 희멀건 물체를 마구 찌른다.있는 힘을 다해 악을 쓰며 찌른다. 핏방울이 튀기고 관통하는 느낌이 칼끝을 통해 전해진다. 소스라쳐 놀라 눈을 떠보니 꿈이다. 내 손엔 칼도 없고 핏자국도 없다. 누구를 왜 찔렀는지 기억도 없다. 다만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릴 뿐이다. 흔히 말하는 가위눌림일까. 심장은 터질 것 같고 섬짓하고 무섭다! 꿈은 수면중의 뇌가 그려내는 단순하고 무의미한 뇌파라고도 하지만, 이전에 형성된 정신의 세계와 억압된 공포와 욕구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는 설도 있으니 더욱 끔찍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꿈은 늘 엉터리거든. 개꿈이야!" 라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는다.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조각그림 맞추듯 나열해 본다... 불길을 알리는 서곡이었을까. 애절한 전주곡 이였을까?....??? 평화롭던 기도 자리가 어수선해 지고, 뒤이어 성모상이 깨지고, 마침내 악몽에 시달린 그 어둔 새벽녘에 어머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셨다. 흉기로 찌른 그 물체는 무엇이었을까. 성모상의 추락과 상본의 빈자리는 내게 무엇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을까. 우연이었다고 하기엔 읽어내지 못한 또 다른 메시지가 있었을 것만 같다. 기도 도구로 쓰이는 종이와 석고에 불과할 뿐이라고, 뒤숭숭한 꿈자리일 뿐이라고, 수없이 되뇌어 보지만 왠지 내 불민한 탓으로 어머님이 '마지막을 맞으신 것' 같아 가슴이 옥조여 온다. 성모상만 깨트리지 않았던들 그런 무지막지한 악몽은 없었을 테고...그랬으면 어머님은 아직...하고 말이다.
-표주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