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다 지날 무렵에 여름옷을 구입하고, 겨울이 다 갈 무렵에 겨울 옷을 장만하는 재미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디자인과 색상 선택에 다소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저렴한 가격으로 제법 쓸만한 옷을 구입할 수 있으니 또 다른 뿌듯한 기분을 뽐낼 수 있어 좋다. 지난 8월 10일경, 동대문 운동장 옆, 너저분한 골목을 바삐 걷는데 "골라 골라 1000원" 하는 고함소리에 사람들 틈을 비집고 머리를 디밀어 보니 산더미 같이 쌓인 옷속에서 손과 손이 분주히 움직인다. '입을 만한 게 뭐있겠나! 사람도 많고! 난 못 골라!' 마침 일행도 있고하여 볼일을 마친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날 공교롭게도 또 그곳을 지나칠 일이 생겼다. 어제 처럼 사람이 많지 않아 내게도 끼어들 틈이 허락되었다. 위에 나딩구는 옷들은 골라 볼 것도 없기에 깊숙히 손을 넣어 보니 딱딱한 물체가 잡힌다. 힘주어 꺼내 보니 포장이 뜯기지 않은 티셔츠가 아닌가. 투명한 포장지 위로 왼쪽 가슴에 수놓은 코뿔소가 얼굴을 내민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여기 저기 살펴 보았으나 흠있는 물건은 아닌성 싶다. 아니나 다를까 눈치 빠른 아줌마가 냅다 언성을 높인다. "메이커예요. 싸게 판다고 싸구려로 취급하지 마세요" 내가 좋아하는 색상 카키도 있고, 빤짝이가 섞인 회색도 잡히고, 잔잔한 첵크무늬 베이지도 하나 골라냈다. 색깔고운 주홍색도 마음을 끈다. 이렇게 4장을 골랐다. 라벨도 선명하여 size 95. 면 100%. 저쪽 귀퉁이에 널부러진 검정바탕에 핑크 무늬 주름치마에도 시선이 머문다. 청 멜빵 반바지도 쓸만하고. 이것 저것 모두 합쳐 계산해 봤자 6.000원이다. 회색은 동서에게, 청 멜빵 반바지와 베이지 티 셔츠는 조카딸에게 주어야지. 카키색과 주름치마는 내가 입고. 발품팔아 돌아다닌 덕분에 부담없이 나누어 줄 수 있다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가볍다. 집으로 오는 길에 생의 끝자락을 잡고 계신 시모님을 수발하는 데레사집을 방문하였다. 마리아 할머니의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달포전 출가한 큰 딸아이가 할머님 뵈오러 새신랑과 함께 온단다. 시댁이 부산이어서 그곳에서 혼례를 하였기에 참석치 못하였으니 새댁에게는 밝은 주홍색 티셔츠를 주라고 당부하였다. 값으로 따지면 보잘것 없지만 부자 마음으로... "나는 이런 날, 행복하다" 2003/09/04 .... 보름전에도 평화시장 나들이를 하였다. 우리집은 삼부자인지라 양복바지는 많을 수록 좋다. 그날도 운이 좋아서 마음에 드는 모직바지가 눈에 띄었다. 덕분에 윗저고리에 받쳐 입을 여러 색상으로 5개나 구입하여 세탁소에 맡기니 아저씨가 물건을 알아본다. "원단과 색상이 참 좋습니다".... 이런 날,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표주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