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듯' 사랑하고 기도하고 후회없이 살자

표주박의 散文노트

외로운 선택

샘터 표주박 2003. 12. 31. 10:27





마지막 달력을 열던 날, 수원에 사는 82세의 할아버지가 치매 합병증으로 입원 중이던 아내가 숨을 거두자 '그동안 정성스럽게 봉양해 줘 고맙다. 나는 어머니 있는 곳으로 간다' 는 유서를 자녀들에게 남기고 자신의 아파트 11층에서 뛰어내린 애달픈 사연이 TV전파를 타고 전해졌다.

할머니를 수발하던 간병인 말에 의하면 전날 할아버지는 아내의 손을 잡고 울먹이며

"제발 죽지만 말아달라. 당신이 가면 나도 따라간다"고 애원하였다는 것이다.

마나님을 먼저 보낸 애통함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단절하고 뒤따른 애틋한 노부부의 마지막 길이, 황혼이혼이 심심지 않게 화젯거리가 되곤 하는 얼룩진 세상사 한 귀퉁이에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젊은 부부의 애정관 변화에 뒤질세라 노부부의 윤리도 변질된 가치관 만큼이나 상처를 입은지 오래이다. 우리들의 마음 한구석에 순수함을 갈구하는 숨겨진 내재율이 할아버지의 선택을 더욱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팔순 노인의 지고지순한 연민의 사랑이 심장에 전이된 듯 가슴이 아려온다.

노부부의 애틋한 부부애를 향하여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뚜벅뚜벅 걸어나와 '純愛譜'라는 현판을 걸며 환호할 것만 같다.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박계주의 '殉愛譜'도 생각난다. 중학교에 진학할 즈음, 이광수의 '흙' '사랑' '유정' '무정'을 탐독하며 소설속 세계에 푹 빠져 며칠씩 흐느끼다가 어린것이 무얼 안다고 훌쩍대느냐고 면박을 받기도 하였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자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생명'이라고 말 할 것이다. 그토록 소중한 생명이지만 확고한 신념으로, 부여한 자에 대한 사명으로, 生을 일관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삶이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흔히 '어쩔수 없이 산다'느니, 혹은 '죽지못해 산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뇌이며 살고있지 않는가. 심지어는 '사는게 죄'라고 말하기도 한다.

톨스토이는 죽음이란 '철저하게 외롭고 고통스런 과정이다' 라고 하였고, 릴케는 '주여, 우리에게 각자 알맞은 죽음을 허락하소서'라는 시구를 남겼다.

그에게 있어서 아내의 뒤를 따르는 '죽음'이 갖는 의미는 '삶'이 갖는 의미와 동일시 여겼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러기에 그의 선택은 외롭고 고통스런 '죽음'을 뛰어넘는 '알맞은 죽음의 허락'이였을 것이라 이해하고 싶을 뿐, 굳이 종교적이나 윤리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다.

육십 년대 후반이었던가? 에릭 시걸은 그시대의 젊은이들에게 '純愛譜'를 선물하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눈 오는 날이면 'Love Story' 주제가와 함께 두 사람의 잔영이 환청처럼 속삭인다.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거야" 라고.

한날 한시 제사를 후손에게 남긴 이 시대의 로맨티스트!
할아버지의 유언장에서도 두 사람의 영혼이 손잡고 걸어나오며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거야....." 나직한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표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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