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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주박의 散文노트

한복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비젼

샘터 표주박 2016. 10. 11. 13:07



한국 사극과 고려복식 : 고증과 창조





고려( A.D. 918-1392)는 고구려의 부흥과 삼국통일을 건국이념으로 하여

신라문화 토대위에 건립되었다.


초기의 복식제도도 통일신라의 제도에 중국환복제도가 응용되었다.

이 시대 배경인 드라마(달의 연인-보보경심)의 복식은 팩션을 더한 환타지이며

현존 복식 유물이 부족한 탓에 창작 의상이 드라마 속에 다량 가미된 것이다.




 

고려 초기인 1123년 경에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당시의 고려 풍경과 복식 풍습을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본래 그림과 책이 한 쌍이었으나 그림을 담은 부분은 사라졌다.


고려는 국교로 불교를 숭상하여 왕실의 장려로 사찰이 건립되고

불교문화가 극도로 화려했던 시기이다




 


고려 후기에는 북방민족과 끊임없이 분쟁과 전투를 계속하는데

거란족의 요(遼), 말갈족의 금(金)에 이어 몽곡족인 징기즈칸의 자손들은

지속적으로 고려를 침략하였다.


고려는 수십년간의 향쟁 끝에

징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이 건국한 원(元)과 화친을 맺고 관계를 유지하였다.


친원파인 충렬왕은 세자 시절에 원에서 돌아올 때 개체 변발 차림으로 입국하여

즉위 후에 모두 몽골복식을 착용할 것을 명하였다.

이로인해 친원파 경향으로 관료층과 상류층에서 몽골복식을 입기 시작했다.


주권을 침해당한 고려 왕들과 향수에 시달리던 몽골 공주들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공민왕을 주인공의 모델로 한 가상역사영화 <쌍화점>은 이러한 관계를 묘사했다.





개체(開涕)는 이마 중앙에 앞머리를 좁게 늘인 몽골식 헤어스타일이다. 

<고려사>를 보면 원의 황제인 대칸과 황후는 고려에 금실 비단실로 화려하게 짜서 만든

탑자포(塔子袍), 금포(金袍), 금단의(金段衣) 등을 예물로 보냈다.

고려의 몽골복식 도입은 처음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다.




 

고려 초기에 왕비(王妃)와 부인(夫人)은 홍색을 숭상하여 그림과 수를 더해 입었고

서민여성에게는 이런 차림이 금지 되었다. 


 



 

고려 초기의 부인들은 나들이 할때 검은 라(羅)로 만든 고급 쓰개인 몽수(蒙首)를 썼다.

또한 귀부인은 허리에 금방울을 가득 달기를 좋아했으며 향을 넣은 비단주머니를 즐겨찼다.


 


 

 

백성의 처와 여성노비도 몽수를 썼으나 길이가 바닥까지 끌리게 길었으므로

정수리에 접어서 올렸다.



 

 

몰골 풍속과 복식도 한때 고려에서 유행하며 몽골풍(蒙骨風)이라 불리운다.

여성 복식중에서 족두리, 연지화장, 장도 차는 모습이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몽골풍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족두리는 원나라의 복식에 비슷한 경태의 장식이 없었고

연지화장은 고구려 시대부터 존재했으며 장도는 몽골에서만 차고 다닌 것이 아니어서

신중한 해석이 필요하다.


조선시대의 궁중 복식에 찍는 금박, 남바위와 철릭의 형태 등이 몽골풍에 더 가깝다.


(발췌글입니다)





2016/10/11

-표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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