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듯' 사랑하고 기도하고 후회없이 살자

표주박의 散文노트

어머니의 초상화

샘터 표주박 2005. 5. 8. 00:16




                                    

오늘, 5월 8일.

여느때와 다르게
가슴이 저리고 아리다

폐공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그 무엇

유년의 기억을 헤집고
한순배 공간을 되짚고
스멀스멀 움직이는
무수한 잔영들

어머니의 초상화
모시 조각보의 고운 문양이
커틴으로 드리워지고

한 땀 한 땀에 서린 눈물이
내 기억의 공간 맨 윗칸에서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린다







어느날, 어머님은 혼잣말 처럼

"아버지가 오빠 태어나던 날, 이걸 샀다고 방학 때 와서 주더라.."

1943년 정월, 첫 아들 '득남'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 고향 본가에서
홀로 산고를 치룬 아내를 생각하며 동경 번화가에서 구입했다는
말씀을 또 하신다.


18개월전 타계하신 어머님이 한창 고우실 때, 애지중지 아끼시던
물건이 있었다. 펄이 박힌 상아색 뿔 분첩. 지금이야 플라스틱이
흔해 길거리에 지천으로 깔렸지만 해방전이었으니 그당시에는
상당히 값나가는 귀한 명품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희미한 옛 기억을 더듬어 보면 가로 6Cm x 세로 9Cm 정도?..
몸체에 고정된 뚜껑 안쪽은 작은 거울이고, 가루분을 담는 동그란
홈에는 작은 구멍이 송송 뚫린 덮개와 분첩. 위쪽에 작은 직사각형
칸도 2개 인데 구리무를 덜어 두는 데라 했다. 분첩은 늘 깨끗했다.
화장 하실 때 한번씩 만져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토록 아끼셨다.

초등 3년때인가?  어머님 몰래 분첩을 가방에 넣고 학교에 갔다.
반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였는데 그게 그만 깜쪽같이 없어졌다.
학교가 끝난 후에도 찾아 보았지만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성난 얼굴만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거짓말하면 감옥가고,
지옥간다 믿던 시절이라 가슴이 콩당거리고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집에 오자마자 무릎 꿇고 겁먹은 소리로 이실직고 하였고,
....결국은 용서를 받았다....^^


 

 

 

또 하나... 어머님이 간직하시던 앙증맞은 전기인두. "아버지가 동경 의과대학 다닐때 하숙집에서 와이셔츠 에리(칼라)를 다리미질 하셨던 거야" 역시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독백처럼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는 방학이면 가족이 있는 고향을 찾으셨지만 오고 가는 뱃길 기찻길에 여러 날을 빼앗기다 보니 고작해야 일주일 정도 어머니 곁에 묵었단다. 스물 둘에 학생각시로 蓮을 맺어 스물 다섯에 連이 풀리기까지... 아버지와 한지붕 밑에서 함께한 시간은 9개월 남짓이었다는 말씀도 놓치지 않으셨다. 일곱 여덟살 계집아이는 그런 말씀을 왜 거듭 하시는 지 알리 없으 련만, 어머니의 깊은 속내를 헤아려 들을 만큼 야물지도 못했건만, 지독한 고독의 사슬을 그렇게라도 해서 풀어 내셨지 싶다. 서럽디 서러운 삶의 한 땀 한 땀을, 모시 올을 세어 색색의 조각을 꿰매 듯... 수많는 하얀 밤을 그 힘으로 버티셨을지도 모른다. "고무신 떨어진 거, 고장난 문고리, 뚫어진 냄비, 받어!" 엿장수 아저씨의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 두살 더 먹은 오빠는 여기 저기 기웃 거리기 바쁘다. 때때로 비밀장소에 숨겨둔 무엇과 엿을 바꿔오면 '오빠 한입 나 한입' 오물거렸다. 꿀맛이 별건가..^^ 그즈음, 다락속에 고이 간직하였던 전기인두가 없어져 소동이 벌어 졌다. 보나마나 오빠의 소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엿바꾸는 것을 못 봤으니 어머니의 거듭된 추궁에도 끝까지 '모른다'고 시치미를 뗏다. 이런 연유로 지아비의 사랑이 담긴 '기념품' 마저도 철부지 녀석들 손에 의해 흔적없이 사라졌으니 그마저도 어머니 소유가 아니었다. 불쌍한 우리 엄마.. 얼마나 서럽고 허전했을까... 아버님 살아계시면 올해 90세...卒壽, 어머님은 세 매듭 모자라는.....米壽, 두분..천국에서는 부디 행복하소서.. 05/05/08 -표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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