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듯' 사랑하고 기도하고 후회없이 살자

표주박의 散文노트

지하철과 자판기 커피..

샘터 표주박 2005. 4. 28. 21:27



나른한 오후의 한나절은 잠이 쏟아지게 마련이다. 특히 지하철에서 오수로 즐기는 풍경은 때때로 코믹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정도가 지나쳐 민망할때도 있다. 그날은 명동에서 예정된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은 후, 2호선을 이용하여 건대 환승역에서 집으로 가던길이다. 저쪽 입구에서 열차가 내 시야를 향해 돌진하듯 힘차게 들어왔고 내 앞을 지나친 앞칸엔 승객이 별로 없다. 문이 열리고 잰 걸음으로 열차 안으로 들어섰다. 빈 자리가 여럿 눈에 뜨인다. 우측 첫번째 좌석에 50대 초반쯤으로보이는 신사는 넥타이가 삐뚤어질 정도로 흐트러져 코까지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신사옆으로 두어 자리가 더 비어있기에 한자리를 비우고 앉았다. 건대역에서 면목역까지 10여분의 편안함을 허락 받은 셈이다. 이어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자판기 종이컵을 들고는 곤히 잠든 신사 옆자리에, 그러니까 내 왼쪽에 앉으려고 몸을 돌리려는 그 순간, 자고 있던 신사가 황급히 일어서다가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컵과 부딪쳤다. 아니 들이 받은 것이다. 신사의 얼굴부터 흘러내린 커피는 와이셔츠 앞자락에 선명한 무늬를 그렸고 그가 일어난 자리에 종이컵에 담긴 커피가 곤두박질쳤다. "앗 뜨거워" 신사양반은 얼떨결에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뛰쳐나가는가 싶었는데 다시 잽싸게 열차 안으로 뛰어 들어와 아가씨 얼굴에 따귀를 힘껏 올려 부치고 쏜살같이 내려 버린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폼 없이 졸다가 하차역을 지나칠뻔 했다는 당혹감이 반사적 행동을 유발 시켜 얼떨결에 내리게 하였을 것이고, 졸지에 커피를 뒤집어 쓴 미묘한 감정의 파장이 그 신사의 이성을 마비 시켰지 싶다. 이 진풍경을 목격한 승객들은 웃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열차에 커피를 들고 들어 온 값을 톡톡히 치룬 그녀를 나무랄 수는 더더욱 없었다. 열차를 기다리는 몇 分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행동이 망신을 자초하였 으니 말이다. 결국 그녀는 내 왼쪽에 앉았고 당황해 하는 기색하나 없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옆자리의 빈 종이컵만을 물끄러미 바라 볼 뿐이다. '좀 모자란게 아닐까' '침착을 가장한 태연함...?' 일까. 내 머리도 복잡해 진다. 진초록 융단에 쏟아진 커피는 아가씨 뺨에 번쩍인 번개보다 더 빠르게 흔적도 없이 스며들었다. 열차 문이 닫히기 직전에 청년이 급하게 올라 탔고 그 청년은 커피가 스며든 자리에 앉으려 한다. 나는 반사적으로 "거기 앉지 마세요." "저 아가씨가 커피 쏟았어요. 앉으면 옷 버립니다." 맞은편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중년 여인이 거든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앉아있는 도덕 불감증인 그녀를 향해 기어이 한마디를 던지고 말았다. "아가씨. 커피를 쏟았으면 뒷정리를 해야지요" 물끄럼히 아래만 내려다 보던 그녀는 마지못해 휴지를 꺼낸다. 그것도 딱 한장을.. 그리고는 매우 느린 동작으 닦는 시늉만을 반복한다. 나는 가방에서 휴대용 화장지 뭉치를 꺼내 몽땅 그녀에게 건네며 "이것으로 꼭꼭 찍어내세요. 아가씨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그녀는 두 정류장을 더 가는 동안까지 맥없는 손짓을 반복하다가 결국은 내렸다. 낮시간에는 열차 배차 간격이 조정되는 관계로 때때로 자판기 커피를 애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열차가 홈으로 들어온다는 신호음이 울리면 재빨리 처리를 한 후에 열차에 오르는 게 正道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묵계된 질서를 지키며 산다. 서로에게 편하고. 서로에게 자유롭고, 또한 서로에 대한 배려이자 문화시민의 자긍심이기도 하기에.... 05/04/28 -표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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