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듯' 사랑하고 기도하고 후회없이 살자

표주박의 散文노트

마음을 치장하는 시간

샘터 표주박 2005. 8. 28. 09:36



"10시 고속버스로 출발하면 12시 30분쯤에 면목역에 갈 수 있어. 출구에 있는 은행에서 만나자. 시원한 냉면 한그릇 먹고 싶어..." ---냉면은 오장동에서나 먹을 일이지 여기까지 웬일이래?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 그 먼데서 하여간 글력도 좋다니깐--- 지난 겨울이 끝나갈 즈음, 남편 고향에 집을 짓고 서울 생활을 청산한 친구가 이 무더위를 무릅쓰고 외진 이곳까지 오겠다는 전화를 받고 걱정스러워서 혼자 궁시렁댄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은 이미 그녀와 마주하고 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던가?' 소원하리만치 잊고 지냈던 긴긴날들은 오간데 없이 자취를 감추고 설렘으로 가득하다. 며칠 전, 강남 모백화점엘 들렀다가 그곳 수준으로는 파격적인 할인가로 판매하는 티셔츠를 5장이나 구입했다. 운이 좋은 날이었다. 늘 즐겨입는 베이지와 카키는 우선 순위로 선택하였고 체리 핑크와 아이보리, 게다가 밝은 연두색 나시까지 욕심을 내어 계산을 했다. 올여름엔 카키색만을 몇 번 입었을 뿐, 나머지는 내년에 입으려고 서랍속에 고이 모셔 두었는데 그것들이 한줄로 서서 나풀대며 퍼레이드를 벌이는 게 아닌가... 내 손은 어느새 장농문을 열고 설합에서 꺼내어 이쪽 저쪽 어깨에 걸쳐보며 맵시를 살피다가 내 얼굴에 그녀의 얼굴을 포개어 본다. ---피부가 맑고 투명하니까 아이보리가 썩 어울릴거야--- ---그래, 지난 초겨울에 입었던 연두색 가죽 잠바도 퍽이나 멋스러웠어! 그럼 연두색 나시도 포장할까?--- ---아이보리는 평범하니까 두루 입을 수 있지만 연두색은 까다로운 색상이니 옷 취향이 까다로운 그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걸레 신세가 될지도?--- 그녀가 충북 산골에서 고속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나는 그녀를 닮은 마네킹에 이색상 저색상 코디를 하며 혼자만의 설렘으로 행복해 진다. 결국은 아이보리색 티셔츠 하나만 포장을 했다. "가령 네가 오후 네시에 온다면 난 세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더 행복해지지. 네시가 되면 벌써 나는 마음이 두근거리고 안절부절해질 거야. 행복의 값어치를 알아내게 되는 거야. 그러나 네가 아무때나 온다면 난 몇 시부터 마음을 치장해야 할 지 모르게 되거든. ........의식이 필요하단다." 개미도 움직이지 않을 무지하게 더운, 낮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 난 그녀로 인하여 무더운 한나절, '여우'의 가르침 처럼 내 의식도 설렘으로 길들여져 갔다...^^ 이윽고 약속한 시간... 내 발걸음도 덩달아 가벼워졌고, 2번 출구 앞에 당도하니 가파른 지하철 계단을 올라오는 그녀의 손엔 커다란 쇼핑백이 들려져 있다. 꽤나 무거운 듯 꾸부정한 자세로 내 발밑에 털석 내려 놓는다. "시골아낙이 들고 올 게 있어야지....ㅎ" 올봄에 난생 처음 씨앗을 뿌려 가꾼 것 몇 개 갖고 왔단다. 농약을 치지 않으니 열매를 맺지 못한다며....전혀 예기치 못했던 깜짝 선물이다. 길에서 열어 보니... 호박. 가지. 고추. 옥수수...ㅎ 친구의 얼굴엔 땀방울이 송골히 맺혀 환하게 웃는다. 시골 자외선에 시달린 티가 전혀 없다. 본인은 기미도 꼈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희고 곱기만 하다... 현관에 보따리를 집어던지 듯 밀어넣고 파라솔로 뜨거운 태양을 가리고 냉면집을 찾아 나섰다. 한불럭을 걸어가 보쌈에 냉면을 곁들여 뚝딱 해치우고 두시간이 넘도록 밀린 이야기를 풀어냈다. 05/08/28 -표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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