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록..... 지금은 후문이 되어버린 성당 북문 앞에서 주임신부님과 마주쳤다. 이미 눈동자가 풀려 초점은 흐려졌고 비틀거리는 중심을 추스르려고 애를 쓰신다. 만취하신 신부님을 면전에서 뵙는 다는 게 민망하고 당혹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는데, "임마! 너 거기 가봤어?" 말린 혀를 힘들게 굴려 한 말씀 던지신다. "???..." 이를 어쩐다. 어디를 가 보았냐고 물으시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절반 감긴 눈으로 살피시더니. "불쌍하잖아" 불쌍하다는 말씀에 그제서야 어렴풋이 감이 잡힌다. '가평 꽃동네'로 보낸 정신분열증 할머니를 잊지 않고 계심이 분명하다. "아~ 네~... 분다 할머니 말씀이신 가요?" "그래! 맞아! 너 거기 몇 번 갔어?" "한번 밖에 못 갔습니다" "한 번? 자식아. 내 말 똑똑히 들어. 한 달에 세 번은 가야해. 불쌍하잖아" 내 손으로 10종류나 되는 서류를 꾸미고, 일대기를 쓰고, 탄원서를 첨부하여 300여명 서명까지 받아 '가평 꽃동네' 정신병동에 보내드린 분다 할머니. 할머니를 돌보던 나는 정작 잊고 있었는데 신부님은 취중에도 기억해 내시다니.
꽃동네 가시긴 전 해 겨울. 몹시 춥던 날, 새벽미사 집전을 마치신 주임 신부님을 모시고 할머니 거처를 방문했었다. 정신분열증 환자임에도 신부님을 알아보고는 귀신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숙이고 신부님 앞에 양순하게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기도를 했었지. 신부님은 나를 보자마자 기도하던 분다할머님를 기억해 내신 것이다. 언젠가도 연도를 마치고 골목에서 신부님과 마주쳤을 때 반갑다는 신호로 발길질까지 서슴지 않으시던 우리신부님. 그리고는 당신 행동에 당신도 놀라신 듯,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시던 그런 신부님이 아니던가. 물론 그때도 취중이셨다. 저토록 마음이 따스하신 분이, 저토록 철저하게 망가지셨으니.. 신부님을 생각하면 눈자위와 마음 텃밭이 늘 습해지곤 했었다. H신부님은 '중증 알코올 중독'으로 치달을 즈음 우리 본당에 부임하셨다. 그로부터 숱한 취중일화를 남기시고 힘들게 4년 임기는 채우셨지만, 본당을 떠나실 즈음에는 사목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이성이 잠식된 상태였다. 본인의 의지만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알코올의 마수에 침몰되어 버린 영혼!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황폐의 늪에서 신음하시는 처절한 몸부림인 걸 어찌하랴. 퇴임하시던 날, 그 몹쓸 情때문에. 마음 여린 신부님은 눈물을 쏟으시며 떠나셨다. 우리 신자들은 가슴 따뜻한 신부님을 통하여 '영혼의 쉬임을 얻고, 현세에서도 천국을 맛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면 너무 비약한 걸까? 따스한 마음으로 신자들의 상한 영혼을 감싸주는 목자.... 어쩌면 근엄한 카리스마보다는 상한 영혼을 감싸주는 자상한 목자가 진정한 하느님의 대리자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라는 커피 광고의 문구가 많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파고든 것은 '따뜻한 가슴'에 대한 목마름이리라. 잘 생긴 배우자를 만나면 결혼식 세 시간이 행복하고, 돈 많은 배우자를 만나면 지갑 속이 행복하단다. 그러나 가슴이 따뜻한 배우자는 '평생 행복 보증'이라는 우스개 소리에 일리있다고 고개가 끄덕여 진다. 신부님은 후일, 불가능처럼 여겨지던 알코올 중독에서 해방되셨다. '중대한 위기의 알코올 중독자'란 무시무시한 진단이 내려졌고 46Kg의 몸으로 '폐쇄병동'에 갇혀 치료를 받으시고 주님의 은총으로 회귀하셨다. 금단증상의 괴로움보다도 더한 괴로움은 추하고 위선적으로 살아온 자신을 바라볼 때가 더욱 고통스러웠다고 가슴 절절한 시어로 고백록에서 술회하신다. '신자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못해준 이름뿐인 신부' 이었다고도 말씀하신다. H신부님은 나의 신앙생활에서 경험한 사제중에서 가장 '가슴이 따뜻하신 분'으로 기억 될 것이다. H신부님은 이후 미국 버나딘 대학교 심리대학원에서 공부하셨으며 현재는 카톨릭 알코올 사목센터 소장으로 알코올 사목 전문이시다. 6권의 저서도 집필하셨다.
|
'표주박의 散文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멈추게 하는 것 (0) | 2003.10.15 |
---|---|
그녀만큼 행복한 이유 (0) | 2003.09.03 |
幻想 속의 純粹美人 (0) | 2003.08.22 |
듣고 싶은 말 한마디 (0) | 2003.08.04 |
처녀들 처럼 (0) | 2003.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