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듯' 사랑하고 기도하고 후회없이 살자

표주박의 散文노트

여기가 무릉도원이라던가?

샘터 표주박 2005. 10. 18. 01:41


본당 구역반장 야외 나들이 일정이 잡힌 날, 비가 올것이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있어 부랴부랴 하루를 앞당겨 강원도 무릉계곡에 오르게 되었다. 새벽부터 일행 81일명이 서둘러 관광버스 2대에 나뉘어 탑승하였다. 고속도로를 달려 동해안 해변도로를 끼고 동해시로 접어 들었고 무릉계곡으로 향하는 초입에서 방문객을 반기는 것은 복숭아나무도 아니요 솔밭도 아니다. 상상과는 전혀 다른, 시멘트공장과 채석장이 우리일행에게 먼저 목례를 보낸다 우리나라 최대 석회석 매장지이자 생산지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흉물스런 회색빛 시설물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 자리에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울창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계곡의 물소리가 기운차게 산을 흔드는 여름 두타산은 용맹한 청년의 기상이고 가을 빛으로 물든 두타산의 아름다움은 농익은 성숙한 여인의 모습에 비견하기도 하였다는데 열흘정도 늑장 부린 기온탓에 10월 중순인데도 아직은 청년 얼굴로 두팔을 벌리고 우리 일행을 맞는다. 매표소를 지나자 이내 무릉반석으로 불리는 넓은 바위가 펼쳐지고 여기서부터 학소대, 쌍폭, 용추폭포 등 기암괴석과 폭포로 무릉계가 장관을 이룬다. 벌써부터 곳곳이 절경이고 기암이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계곡 여기저기에서 작은 폭포가 30∼40개나 생긴다는 경관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주어진 두시간 반의 산행일기를 알뜰하게 꾸밀참이다. 계곡을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만난 무릉반석.너럭바위 하나의 너비가 무려 6천6백㎡라고.반석위로 흐르는 물은 마치 유리위를 미끄러지는 맑은 구슬같다. 이 바위에 조선 전기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양사언의 글이 석각으로 새겨져 '무릉계곡'으로 불리게 되었고 한다. '武陵仙境(무릉선경) 中臺泉石(중대천석) 頭陀洞天(두타동천)'이란 글귀도 석각으로 선명히 남아 있다고. 뿐만아니라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해서 수많은 시인묵객의 시가 1,500여 평의 무릉반석 위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부실하고 체력도 자신없으니 난 이쯤에서 바위에 새겨진 글귀에나 파묻혀 해독이 가능한 글자가 몇이나 될까 헤어볼까..하는 유혹에 잠시 머뭇거리다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무릉반석을 지나 등산로 폭은 3-5m로 넓고 편하다. 싱그러운 공기가 온 몸을 감싸며 나 또한 신선이 된 듯 하다. 반석교를 건너 기암으로 이루어진 학소대와 상면을 하고 계류 위에 놓인 철다리에 이르러 아래를 내려다 보니 저만치 아래에 면경같이 투명한 물위에 또하나의 하늘이 둥실댄다. 왼쪽은 벼랑,오른쪽은 천야만야한 거대한 암벽이 막아선 가운데 벼랑에는 4단폭포가 걸려 있는 것이 학의 날개짓이 보이는 듯한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하여 학소대라고 불리운단다 . 조금 더 올라가자 드디어 길 왼편에 두 줄기의 폭포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쌍폭은 주등산로에서 약간 벗어났기에 내 느린 발걸음 탓에 후미에 속해 있으니 짧은 감탄사로만 화답을 보내고 용추 폭포를 향해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그 바로 머리 위에서 상중하 3개로 이루어진 용추 폭포가 장관을 드러낸다. 상중담(潭)은 독항아리 옹형(瓮形)을 갖추었고 중담에서 하담으로는 높이10m의 절벽폭포라 하는데 철계단을 올라온 사람에게만 모습을 보여준다고.. 나는 일행보다 느린 걸음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하담을 보는 것 만으로도 만족 해야 했다. 철제 계단을 올라 하늘문을 열기엔 체력이 허락하지 않으니...^^ 두 영산의 힘을 모아 빚어 물줄기를 담아내는 하담은 주위 둘레가 30m로서 물빛은 무서울 정도로 푸르다 못해 검다. 얼마나 깊은지는 측량할 수 없다고... 이미 정상을 정복하고 내려온 구역식구들과 소에 발을 담가보지만 5분도 견디지 못하고 물끼를 닦아야만 했다.
무릉반석
무릉반석에 좋고 아름다운 사연만 새겨진 게 아니다. 그 이름들 속에는 조선시대 이 산에 숨어든 사람들을 잡기 위해 왔던 토포사 (포도대장)들이 새겨 놓은 이름들도 선명하게 남아 있고. 암울하던 군사정권 시대인 1981년, 무릉계에 들른 김지하 시인은 이 아름다운 무릉반석에서 귀곡성을 들었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곳에서 죽어간 수천 목숨의 아우성이었다. 그리고 5년 뒤인 1986년에 구술로서 펴낸 시집 <검은 산 하얀 방>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삼화사 너럭바위 입구에서부터 내 귀를 때리며 심장을 조이며 내 뇌수 전체를 뒤흔드는 총 소리, 포탄 소리, 비행기 폭음 소리, 아우성 아우성 소리, 그 중에도 견딜 수 없었던 그 어버이를 부르는 아이들 울음소리, 그리고 이상하게 떨리던 여인들의 귀곡성, 귀곡성, 귀곡성의 끝없는 환청. 머리 뒤를 잡아끄는 보이지 않는 손길들, 다리를 잡아당기는 물과 바위와 잡초들의 기괴한 엉킴, 숯처럼, 마치 썩어 가는 시체처럼 거무칙칙한 절벽에서 빛나는 음산한 햇빛, 검은 갈가마귀들의 불길한 울부짖음, 여기저기 도처에 널려 있는 불에 타 죽은 시커먼 고목들, 나는 질려 버렸다.’ 결국 시인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다시피 파쏘, 비린내골, 파소굽이라는 원한 서린 지명들이 떠도는 이 골짜기를 벗어났다. 당시 시인이 남긴 시 한 수이다. '두타산은 일곱 개의 피복창이 있었다고 하더라 / 오십 개의 우물터가 있었다고 하더라 / 오천 명이 한 날 한 시에 총 맞아 죽었다고 하더라 / 피쏘 한복판에 물 못 들어가는 큰 구멍 하나 있다 하더라 / 그 구멍 속에 한 여자가 발 거꾸로 해 지금도 떠있다 하더라…’ (김지하 시인의 ‘너럭바위 1’ 중에서) 세상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공존하듯, 이토록 맑은 무릉계곡의 아름다운 풍경화 속에 기쁜 추억과 악몽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05/10/18 -표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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