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이듯' 사랑하고 기도하고 후회없이 살자

표주박의 散文노트

낙엽비를 맞고 싶다

샘터 표주박 2001. 10. 8. 20:35





높고 푸른 가을 하늘 맑은 햇살이 노란손 빨간손 흔들어 잎새를
깨운다. 흔히들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어디 여자의 계절이 따로 있고 남자가 계절이 따로 있겠는가
가을이라는 계절은 어쩐지 우리들 마음을 허전케하여 어디로든 훌쩍
떠나라 유혹하는 계절이다.
시인은 낙엽 하나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지는 낙엽을 보며
내년 봄에 돋아날 연둣빛 속삭임을 듣고 소망을 노래한다.

나도 시인처럼 시 한 수 품고
가을 하늘에, 가을 산에, 가을 들에 흠씬 취해 보고 싶어진다

오색 색동 입은 가을이 어디 산에만 물감을 쏟고,
오곡이 여물어 고개를 숙인 들판에만 머무르랴....
서울이라고 오직 검은 아스팔트와 잿빚 시멘트 건물만 있으랴....

빌딩 숲에 둘러싸여 자동차 매연으로 숨이 막히는 서울이지만 그래도
둘러보면 여름 햇살 물러간 서울 거리 곳곳에 울긋불긋한 추색 상념을
걸어 둘만한 데가 제법 여러 곳 있다.
아직은 노오란 물감을 퍼올리기에 바쁜 은행나무와 넓다란 깃을 드리운
프라타나스, 새색시 볼처럼 붉은 부끄러움을 숨긴 단풍나무도 짙은
화장을 쏟아낼 준비를 하느라 여염이 없다

'만산 홍엽' 이 아닌 '거리 홍엽' 일지라도
삶에 찌들고 메마른 도회지의 잡다한 일상이지만 잠시의 시간을
쪼개어 가을빛이 빚어낸 도심 여울에 두손을 담구어 파란 하늘을
한웅큼 퍼 올려보자

덕수궁 돌담 길. 그리고 경복궁 길....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던 데이트 코스 1번지이다
그저 생각만 해도 미소짓게 하는 크고 작은 추억이 서려 있는 곳.
돌담을 끼고 은행잎 닮은 함박꽃 웃음 줍던 길...
옆에서 걷는 낮선 사람의 손이라도 텁석 잡고 인사 나누고 싶어지는
정겨운 곳이기도 하다

나른한 오후 점심시간 한 자락 베어내어 직장동료와 덕수궁 고건물에
드리워진 가을 하늘에 하오의 권태를 헹구어 걸어두면 새로운 힘이
솟기도 했을 셀러리맨의 휴식처이기도 하다


오늘(10/7) 집안에 작은 행사가 있어 태릉입구에서 삼육대를 지나
구리로 이어진 플라타나스 터널 길을 달렸다.
넓쩍하고 숱많은 프라타나스 잎새들이 아직은 누릇한 카키 얼굴로
손을 흔들어 환영해 주었지만 며칠 후면 갈색 낙엽을 떨굴 것 처럼
가지끝 부터 물들고 있었다.


힐튼호텔에서 한남동 외국인 아파트로 이어지는 소월로....

초등교 시절 광화문 학교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시리고 매운 새벽
댓바람을 안고 열 살도 안된 잰걸음으로 등교하던 길이다.
그 땐 남산 허리를 잘라낸 비포장 도로였던 그 길이,
볼품없던 아카시아가 울창했던 그 곳이,
50년 가까운 세월의 뒤안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은 노란 은행나무가
곱기로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늘 코를 쥐게 하는 악취로 주변을 괴롭혔던 중랑천 변,
그리고 목동천 제방 길도 이젠 '걷고 싶은 거리' 로 거듭 태어났다
핸들을 잡은 이들이 차창 밖 가을 색을 바라보며 잠시의 피로를 덜어
낼 수 있으리라
지난 추석날 그 바쁜 와중에도 해질 무렵 바오로와 중랑천 제방을
거닐었다. 말 그대로 악취천이던 곳이 산뜻한 공원으로, 잘 정돈된
체력 단련장으로 변모하여 두어시간 남짓 더부룩한 속을 다스리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이랴....
아이들 초등교 시절 야구 방망이와 배드민턴 라켓을 아버지와 휘둘던
어린이 대공원 산책로도 벚나무 단풍나무 등 갖가지 수목들이 가을의
절정을 향해 마지막 매무새를 여미며 산책객을 기다리고 있다.
황금 융단이 포근한 금잔디, 낮익은 동물의 초롱한 눈망울과 재롱을
덤으로 얹을 수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워커힐 길....
구의 수원지에서 워커힐로 향하는 짧은 구간에도 산벚 나무등 수많은
가로수가 도열해 있어 제법 울창한 맛까지 풍긴다.
그리고 양재동 시민의 숲 산책로도 단풍나무가 답답한 가슴을 씻어
주고, 백제의 향취가 남아있는 위례성 길도 운치가 있는 곳이다


매연에 찌든 길거리 단풍이 못내 성에 차지 않으면 아예 등산화를
신고 가까이에 있는 산에 오르자.

작년 이맘때 불광역에서 북한산 등산로를 잇는 길에 줄지어 늘어선
은행나무에서 낙하하는 아름다운 은행잎 비를 맞았다
발을 옮길 때마다 노오란 잎새에 새겨진 등산화 자욱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날의 노란 잎새들은 아직도 내 곁에 소복하다.


은행나무가 아름다운 청계산 진입로,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관악산 진입로도 으뜸길이다.
워커힐을 품은 아차산 능선으로 이어진 용마산에 오르면
도봉산 소요산 불암산도 우리를 부른다


설악산이다, 지리산이다, 내장산이다....
하기야 어디 그만이야 하겠냐만....

바쁜 일상을 뒤로 밀치고 잠시나마 빌딩 숲에 묻힌 도심의 가을을
만끽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이 가을 매연에 찌든 은행잎 이라도 좋으니 낙엽비를 맞으며
가을끝에 서 있고 싶다



-표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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